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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바다 정복의 역사

과정 2017. 5. 15. 05:24


B.C 6000년경 

세계 4대 문명이 싹이 튼다.


인도의 인더스강유역 BC 4500년

이라크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BC 4500년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BC 4500년

중국의 황하강 유역 BC 3500년



그 중 나일강만이 수상운송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메소포타미아 강들은 수로로 사용하기 어려운 몇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북쪽에 있는 강들의 상류는 얕고 바위투성에, 바람이 강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불었다.



반면 나일강은 넓고 툭 트인 강줄기와 물의 흐름과는 

반대방향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강의 양방향으로 쉽게 왕래가 가능했다!!!!

나일 계곡의 주민들은 그곳의 전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편리한 강 덕분에 크고 작은다양한 형태의 배들을 만들어내고, 

또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항해 장치인 돛을 사용하게 되었다!!!

외쳐 나일갓!!!!



초기의 배는 통나무나 갈대를 묶어 만든 뗏목을 이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배를 앞으로 나아가는데 쓰는 노를 만드는 법,배 끝에 키 구실을 하는 노들을 장착하는 법,

한 쌍의 갑판 선실을 들여놓을 만큼 크고 많은 노잡이들이 필요한 큰배를 만드는 법을 터득한다.



그 후 닝겐들은 인간과 동물의 근육이 아닌 또 다른 에너지원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이용하여 배를 모는 법을 익힘으로써 수상운송의 신기원을 이룩한다.


그것은 바로 바람 !!!



이후 돛을 하나 달아 바람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Sigle Master 1본 마스트선 시대

대표적인 배로는  바이킹 선, 한자동맹의 코그선, 지중해의 갤리선


BC 300년경 북유럽의 가장 오래된 배 바이킹선


원래 바이킹 선은 돛이 없고 연안에서 노만을 사용했으나 원양에 도전

마스트 한 개를 세워 간단한 사각범을 달고 항해하기 시작하여 8~9세기에는 범노선으로 등장!!


돛대에 단 큰 가로돛으로 추진되었던 이 배는 군선에 비해 노의 수는 적었다.

12세기에는 대형 선박의 선수와 선미에 설치된 가벼운 선루를 제외하고 배의 모양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바이킹선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어 그 선형과 구조가 가장 상세하고 올바르게 알려진 고선



그러나 동시대 마지막 범선의 역사에서 여러가지 중대한 변화 중의 하나는 선미키의 도입

선미키가 언제쯤 최초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200년경 폴란드 또는 그 근처라고 한다



암흑의 시대 중세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배가 만들어지게 된다.



당시 살던 사람들은 지중해 지역이 지구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지구는 지중해라는 커다란 대양으로 둘러싸인 원판형이었으며, 

이 대양이 저 먼 곳에서 거대한 벽으로 하늘을 바치고 있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북쪽 대양이 얼음으로 변하면 남쪽 대양은 뜨거워서 물이 끓는다고 생각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고대 지리학이 유럽에 전해지게 되고 이들은 아랍인들 덕택에 생각이 바뀌게 된다.



중세기 유럽은 도시국가의 발달로

지중해에서는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주요도시들이 번영 !!



베네치아는 시초에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후에 공화국으로 독립

11세기 강력한 함대와 상선단을 조직하여 아드리아해를 제압하고 동방과 유럽간의 국제 무역을 중개

제노바도 10세기 말 이슬람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피자와 연합하여 무장하고 도시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동방무역에 종사



이탈리아 여러 도시가 활용한 배들은 고대 로마제국이 쓰던 배와 그 계통이 같은 것이었으며

이들 지중해의 배는 군용 갤리선과 라운드 상선으로 구분할 수 있고 13~14세기부터는 대형 갤리상선이 나타나게 된다.



이후 봉건제도의 붕괴가 신흥도시의 상공경제를 탄생하게 했고 

새로운 사회 구조속에서 베네치아, 제노바, 리용 등과 같은 도시들이 왕권에 비견할 만한 경력한 도시로 성장


한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잡은 이베리아 반도

지중해가 중심무역로인데 변방에 자리한 두 국가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유럽 중심부의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입지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만일 그들이 교회의 수하로 편입되지 않는다면 경쟁자들과 어깨를 겨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황

귀족으로서의 탐욕은 어쩔 수 없고 후발 귀족으로서 경쟁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그들로서는 무엇인가 공공연히 과시할 수 있는

새로운 공장력의 봉토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봉토가 저 먼 나라에 있다고 하더라도 무슨상관인가...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마르코폴로가 1271년부터 1295년까지 동방을 여행한 체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기록한 여행기

동방견문록이 발간되면서 미지의 대륙에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 왕들과 귀족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지판구(일본)와 케세이(중국)도 존재한다는 것이 전해지고 이로부터 이들의 사고 속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같은 대양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믿게 되고 서쪽으로의 항해가 가능하다고 믿게 된다.


이 때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 콜럼버스가 나타나 신대륙을 발견하겠다며 제독의 칭호와 돈을 요구.

신대륙 총독이 되게 해줄 거라는 이사벨 여왕의 약속을 받고, 항해 시작



콜럼버스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금과 향료의 나라 '동양' 이라고 믿었던 신대륙을 발견하기를 원했다.

"1492년 8월 3일 금요일 8시.

살테스의 강어귀에서 모래톱을 가로질러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풍향이 자주 바뀌는 강한 바람을 타고

해질 무렵까지 48마일, 즉 16리그를 항해한 후, 카나리 제도 쪽으로 항로를 잡고서 남서쪽과 남미서쪽으로 항해했다."



콜럼버스가 탄 산타 마리아호, 핀손 형제가 탄 핀타호, 그리고 니냐호가 에스파냐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이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아직까지는 미지의 '검은 바다' 대서양을 향했다.

그들에게 첫 항로인 대서양을 횡단하는 동안 오랜 바다 생활에 지친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킬 위험도 있었고,

낮게 드리워진 구름을 육지로 착각하기도 했다.


"항해일지 9월 24일.

육지가 나타날 조짐이 보이는데도 현재 나와 선원들의 관계는 심각한 상태다."


10월이 되자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가자는 원성으 목소리가 높아졌다. 

콜럼버스 :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그럼 여러분 모두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요."



1492년 10월 12일 새벽


핀타호에 타고 있던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가 

"육지가 보인다 !!! "

외친 순간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 상륙과 카리브 지역 탐험을 마치고

몇 명의 원주민들을 납치해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위대한 발견의 시대'

대항해시대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럽인들에게 원양항해는 이때가 최초였다.

원양항해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은 전무했고, 현지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없었다.

아니 그 현지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몰랐었다.



그러나 과거 이슬람과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나침반, 아스트롤라베, 쿼드런트 같은

각종 뛰어난 측정기구들은 태양과 별의 위치보다도 더 정확하게 방위를 알 수 있게 해주었고,

그들의 원양항해술을 배울 수 있었다.



1302년의 항해용 컴퍼스의 창조,

1471년의 원양항해에 불가결한 레기오몬타누스의 항해력의 작성 등 항해 기술의 발전이

이른바 '대항해 시대'의 화려한 개막을 예고



이 후 기초적인 원양항해 능력과 때마침 강성해진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항해술은 급속도로 발달

카락과 캐러밸같은 본격적인 대양 항해용 선박들이 등장



원주민들의 존재를 확인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신대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항로의 등장은 그들의 인식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국가 단위로 행해진 탐사가 열띠게 벌어졌고 곧 이는 국가 간의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신대륙인 아메리카와 함께 유럽인들의 원래 목적이었던 인도로의 항로 개발도 충실히 이루어져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드디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달한다.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는 더 나아가 말라카까지 정복하여 

동남아시아 진출로의 교두보까지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무역의 판도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속된 탐험으로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이 인도가 아닌 또 다른 대륙임이 밝혀지게 되었고

"아메리카"로 명명되게 되었다.



아메리카와 인도가 다른 지역임이 알려지고 

향신료 원산지인 인도와 동남아시아로의 진출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유럽인들은 '그렇다면 아메리카와 인도 사이에 또 뭐가 있단 말인가?'라는 궁금증에 휩싸이게 된다.

이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 바로 

태평양


태평양의 발견과 함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함대가 최초로 세계일주를 마치는데 성공



그들의 눈에 제대로된 세계와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후 동인도회사의 등장과 함께 식민지 경쟁과 제국주의로 접어들게 되는데...



14-16세기 일어난 르네상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고

지도학, 항해, 화학, 조선 비약적으로 급격하게 발달


돈에 굶주린 이베리아 반도의 두 국가가 선박을 개조 

중세 유럽의 범선을 기초로 지중해, 북유럽 선박의 혁신적인 부분을 도입,

이후 아랍의 배 부분을 추가적으로 개조해 좋은 선박을 만든다.


카락과 캐러밸은 그렇게 대서양을 진압하고 다녔는데...



하지만 문제도 많았다.

각종 창작물에서의 묘사와 게임 때문에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시대이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시 선원들이 운용했던 범선의 크기는 한강 유람선 수준

손바닥만한 배에 수십명의 선원들과 함께, 몇달 씩 육지를 보지못한 채

그저 바람에 의존한 채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고통의 항해 속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후 


블루베리, 카카오, 옥수수, 감자 등 새로운 과일 및 채소를 들여오게 되고

금과 은 등 대량의 귀금속을 유럽으로 가져온다.



스페인들의 정복자들에 의해 마야 문명, 잉카 제국, 아즈텍이 차례대로 멸망하게 되고

중남미 아메리카는 브라질을 제외하고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좋은 말로 탐험가, 나쁜 말로 약탈자

빛과 그림자 처럼 두 면이 존재


그 중 특히 아메리카의 금, 은은 에스파냐를 통해 유럽으로 대량 유입

물가를 20,30배 폭등시킨 가격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자본주의 대규모 경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게 되자

북해의 영국과 네덜란드

호옹이?



대항해시대에 동참하게 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자 간의 합의만

이뤄졌을 뿐인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간단히 무시

몇차례의 분쟁과 전쟁을 걸쳐 앞선 두나라가 

얻어낸 영토와 이권을 어느 정도 뺐어오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해상 무역과 거점 확보를 총괄하는 동인도 회사를 각각 설치

본격적인 범세계적 무역활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양쪽 모두 해상 강국으로 성장하다 벌어진 충돌에서 영국이 승리하게 되고

이는 대영제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



대항해시대는 수십 년에 걸친 탐험과 개척, 정복 끝에 유럽인들이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문명들을 발견하여 더이상 새롭게 찾아나갈 곳이 없어지자

자연스레 끝나게 된다.



이쯤되자 거의 유럽에서 먹고 살만한 나라들은 대부분 대양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한편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씹강간을 당하고 있었고

일본이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문호개방을 강요당하며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유럽열강에게

먼지 날 때까지 후두려 맞고 있었다.



쪽들쪽들...


헬좆센도 쇄국정책으로 버티다 결국 일본에 탈탈 털리고 문호개방을 하게 되는데


19세기 초 서구열강의 식민지 건설과 세계 1차 대전의 발발로 혼돈의 카오스 상태



한편 1912년 4월 영국의 타이타닉 호가 바다로 아다를 떼고 출항을 하는데

물론 바닷속으로 추락.



이 때쯤 새로운 돛에서 증기기관으로의 추진방식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고

목선에서 철선으로의 선체구조의 변화는 조선사에서의 일대 혁명



하지만 철로 만들어서 추진력과 속도가 안좋았다.

배수량에 해당하는 부력에 의해 배가 물에 뜨는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철은 물에 뜨지 않기 때문에 배를 만드는 재료로는 적합하지 않다"라는 논의조차 있었다.


계속해서 과학과 기술이 발전



디젤기관을 도입

선박은 좋은 효율을 가진 엔진을 가지게 된다.

개선에 개선이 되어가던 도중 



일찍 문호를 개방한 일본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체제정비

제국주의에 합류하게 되는데 주제를 알지 못하고 



진주만을 습격한다.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일본은

1944년 7월 레이테만 해전에서 탈탈 털리고 파죽지세로 무너지게 된다.



미국 정부는 해상에서의 원자력 추진에 대한 프로젝트를 설립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이 노력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원자력 평화이용 노력의 일환으로 실시.

1956년 7월 30일에 N.S. 사반나호의 건조를 승인


건조작업이 여러 차례 지연되고 비용이 초과되는 등

우여곡적을 겪은 후에 드디어


1963년 1월 13일 사반나 호 처녀항해에 나선다.



그후 10년간 전세계를 항해 화물과 승극을 운송

배의 원자로는 훌륭하게 작동됬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

배를 돌리는 비용이 수입보다 훨씬 많은 것 !!!


1971년 9월 마지막 정박 장소인 텍사스의 갤버스턴에 도착.

그곳에서 항해를 중단하고 영구 보관


이후

앞선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원자력을 항공모함에 도입


바다는 미국이 재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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