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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21세기 한국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을 만든 창업주 이병철이 태어난다.
그의 조상 중 한 사람이 1600년대
벼슬을 버리고 진주로 낙향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거주지로 삼으며 진주에 뿌리를 내린다.
시골로 낙향하여 향반으로 몰락했지만 할아버지의 대에
1천석의 벼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
아버지 역시 1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과 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
(외쳐 갓 진주 !!!)
정주영이 흙수저에 가난뱅이였다면
이병철은 금수저에 집안내력씹셐타취!!!
어려서 할아버지 문산 이홍석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배우며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1920년 11살
지수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 가회동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쌍도라 놀리지마라 죽인다!!!
이후 17세에 결혼을 하게 된다.
1907년 11월 8일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동 산골마을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아버지와 어머니 손씨의 4녀로 태어난
호암 이병철의 신부 박두을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는
1929년 결혼했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상경하여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부모님 : 안되. 돌아가
이병철 : 빼애애애애액 갈거야 해줘
부모님이 일본 유학을 반대하자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한다.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조흥제가 흔쾌히 수락,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에 유학한다.
1929년 4월 20세에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
대학시절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된다.
대학생 시절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1학년 때 건강의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병을 치료 했으나 fail...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하면 뭣 하나"
결국 1930년 대학교 자퇴 후 귀국한다.
고향으로 온 후 먹고 자고 싸고 무위도식하던 이병철
그러던 어느날 밤새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는다.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우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그는
아버지 이찬우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던 참이다.
마음 껏 네 뜻을 펼쳐봐라"
경성부터 평양, 부산, 대구 등지를 직접 물색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오른다.
쌀을 생각한 그는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다."
1936년 고향 친구 정현용, 박정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운영
But 중일전쟁의 여파로 정미소 자동차 회사 김해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빈털터리 가난한 집이 된다.
But 1936년 마산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작으로
1938년 대구 삼성상회 설립
1939년 조선양조 인수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 및 수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
일제 패망 후
1951년 부산 삼성물산 설립
1953년 제일제당(현 CJ그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
본격적인 그룹 규모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한다.
부친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고,
이를 이용해 정권과의 연고를 만들 수 있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여러 지원을 받으며 성장
5.16 군사혁명 당시
무시못할 재벌로 성장한다 !!!
한때 군사정권은 이병철 창업주 등을 부패 혐의로 몰았으나
경제 운용과 성장을 위해 이들과 타협하였고,
이회장도 군사정권과 협력 관계를 갖게 된다.
박정희 치하에서 성장한 정주영 회장 등과 달리 이미 기틀이 잡혀 있었고,
출신도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상류층의 품행과 교양을 갖추고 귀족적 사고가
강하던 이병철 회장은 초기 반 기득권적 성향에 교양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사적으로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화폐개혁 당시 훈수를 둔 썰이 있다.
1962년 6월 9일 밤 10시
공표된 통화개혁
"부정부패 등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이 상당히 온존해 있고
이는 산업자금화나 장기저축으로 되어 있지 않다. 누증된 통화량은
언제든지 투기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악성 인플레의 요인이 되고 있다"
국가에 의한 사유재산의 침해라며 당시 많은 비난을 받는다.
다음날 10일 아침 재게의 거물 이병철 삼성 사장을 부른다.
"어젯밤 방송 들었지요?"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조달에는 이 길밖에 없다고 하여 단행한 것입니다.
극비리에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최고회의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새 지폐는 천병규 장관이 영국에서 인쇄했습니다"
"신화폐의 교환을 위해 날마다 수백만 명의 은행창구에 줄을 서야 하므로
그 원성이 모두 정부에 돌아갈 것이고 국민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에너지의 낭비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화개혁은 해만 남겼지 성공한 예가 거의 없습니다. 2차 대전 후 서독은 워낙
인플레가 심해 그 수습 책으로 통화개혁을 단행했었지만 한국의 사정은 다릅니다.
큰 돈 가진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경제인의 의견도 사전에 들을 걸 그랬군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해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정치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데...
다른 방도가 없을까요?"
"전면 해제가 어려우면 기술적으로 풀어가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화폐개혁은 실패했지만
그 의도만큼은 좋았다.
화교 짱개 퇴치 등등
*국가기록원에 정확한 기록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3523
일찍이 한일은행 상업은행 조흥은행 등
안국화재 동방생명 등을 인수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
1966년 대한암협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
1965년 중앙일보사를 설립
삼성장학회 설립, 대구대학 및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낸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등을 통해 첨단전자통신 및 반도체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삼성그룹을 성장
햇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드리우는 법
1966년 5월 24일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생한다.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 (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어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 것.
이것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포대를 압수
벌금 2천여만원을 부과
후일 이병철은 자신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정부가 삼성을 죽이려고 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때 박정희 정권과 사적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경영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으나
1968년 삼성그룹에 다시 복귀
이후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를 밀어내고
막내아들 이건희를 삼성그룹의 후계 회장으로 임명
말년에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견하여,
당시에는 도박이나 다름없었던 반도체 산업에
삼성전자가 진출하도록 한다.
이후 이 반도체 산업은 삼성이 TV와 휴대폰, 특히 스마트폰을 통해
21세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준다.
사적으로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고 욕심도 많았던 그는
호암미술관을 설립해 국보급 문화재들을 주도적으로 모은다.
다만 이들 중에는 도굴품으로 여겨지는 것을 사들인 것도 상당수라는 것이
고고학계에 퍼져있다.
도굴범을 후원해서 사주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루머일뿐.
군사정권 시절 고고학계가 자금난에 허덕일 때 일부 도굴꾼들이 고급장비를 갖췄었기에 화제가 된 것
또한 재벌로는 이례적으로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 연락도 없이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단지 터의 크기만 물어보고는 당시 돈 3만원을 선물하고 떠났다고 한다.
사업철학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다'
사람욕심이 많았던 그는 인재 양성에 많은 투자를 했다.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이러한 경영이념을 집대성한 호암자전에서는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할 자세라고 언급한다.
한때 이병철과 정주영은 라이벌 관계로
정주영은 가난한 소작민의 아들로써
이병철은 가문 있는 귀족 자제로써
흔히 말하는 금수저와 흙수저로
서로 성격도 많이 달랐다.
항상 정주영은 "해보기나 했어?" 저돌적이였으며
이병철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 치밀하고 꼼꼼했다.
성장 라인이 달랐던 그 둘은
1985년 11월
정주영의 고희연에 이병철이 참석하면서
이때 백자를 선물하며 화해의 길을 걷는다.
1987년 11월 19일
폐암으로 78세의 나이로 사망
사후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특별추서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 추서
일본으로부터 일훈일등서보장이 추서
1999년 12월
매일경제와 전경련이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의 한사람으로 선정
1960년대부터 두 거목이 이끌어온 대한민국의 경제
캐더린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지 명예회장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만난 거인"
잭 웰치 제너럴 일렉트릭사 회장
"진취적 의욕에 불탓던 낮은 목소리"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그의 열정은
지금 막내아들 이건희 회장이 이어받아 삼성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