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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240년 11월이었다.
몽골의 군대가 러시아의 수도 키예프를 침공.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키예프는 1달을 못 버틴 채 몽골의 맹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키예프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던 첨단 공성무기들과 몽골의 최정예 기마병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모스크바를 뚫어버리고..
키예프도 뚫어버리고..
동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비참하게 짓밟혔다
중국을 멸망시키고 유럽까지 진격해온 몽골 군대의 위용에 유럽은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 각국은 그야말로 충격와 공포에 휩싸였다
몽골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중부 유럽을 향해 전진한다..
몽골군은 사전에 스파이를 보내서 중부 유럽을 샅샅이 정찰한 뒤에
하나는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진격하고
다른 군대는 헝가리를 관통하여 빈으로 진격하기로 했던 것이다
<폴란드 크라코프의 병사들은 적군의 침입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으나 얼마 못가 몽골 궁기병의 화살이 몸에 꽂혀 잇달아 사망했다>
당시 유럽은 중세 암흑기였고 외세의 침입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러나 키예프가 몽골에게 멸망 당한 이후 러시아 지역 난민들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들은 몽골을 겪은 무서운 이야기를 전파했고 뒤따라 몽골이 침입해오고 있었다..
그 때 유럽 각국의 왕들은 최후의 심판을 떠올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크라코프에서도 유럽군은 키예프처럼 1달도 못 버티고 몽골군에게 몰살 당하고 말았다
의기양양한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독일 공격을 감행한다
독일 슐레지엔의 영주였던 하인리히 2세의 총 지휘 아래에 독일+프랑스 연합군은 몽골군에 맞선다
그 결과 병력 면에서 우세였던 연합군은 몽골군의 전술에 휘말려 비참하게 몰살 당하고 말았다..
곧이어 독일 프랑스 연합군을 몰살시킨 몽골의 전술이 헝가리와의 전투에서도 반복되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헝가리는 더 대규모로 몰살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수부타이:몽골제국의 개국공신으로서 징기스칸에게 절대 충성한 장군 중 한 명이다.
중국 및 동부 유럽에 걸쳐 32개국을 정복하는 데 공을 세운 장군이며 동부 유럽 원정을 마치고 귀환했다.
특히 호라즘의 국왕을 추격하여 카스피해의 섬으로 몰아넣어 죽여버린 일로 유명하다. 서양에서는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전술가로 평가받는다.>
몽골군의 지휘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헝가리의 10만 대군이 나타나자 도망치며 유인하기로 했다..
몽골군은 소규모 병력을 자주 보내 일부러 패배하게 했고 적당히 봐주면서 원활하게 헝가리군을 낚았다
그러자 헝가리군은 자신만만하여 6일 정도 몽골군을 추격했다... 몽골은 계속 후퇴했고 헝가리는 함정으로 달려나갔다
드디어 1241년 4월, 헝가리군 10만 vs 몽골군 5만이 전투를 시작하였다
헝가리군은 마차를 끌고와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만들며 몽골군에 대항했다
몽골군이 자신들의 군대를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기동력 좋은 정예 부대가 헝가리군을 포위했다
몽골군은 화살뿐만 아니라 나프타, 화약, 기름 등이 섞인 이상한 불덩이를 투석기로 쏟아부었다
헝가리군은 저항했으나 '불덩이'에 당황하여 발악하기 시작했다
몽골군은 열심히 죽여대다가 슬쩍 퇴로를 일부러 내주었고
헝가리 군대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헝가리군은 싸우기 전에 몽골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들어본대로 맹렬한 공격을 받아서 더욱 공포감을 느꼈고 자신들의 무리한 추격이 실수였음을 깨닫게 된다
몽골군은 빠져나가는 헝가리군을 숲으로 몰아넣었고 숲너머에는 수부타이 장군의 부대가 숨어있었다..
그 숲에서 헝가리군은 떼죽음을 당했고 왕과 부하 몇몇은 도망쳤으나
헝가리는 농업이 피폐해지고 국토 전체가 초토화 되었다..
지금도 헝가리에는 그날의 참혹한 전투를 연상시키는 기념비가 남아있다..
몽골군은 승리한 뒤 헝가리를 약탈했고 헝가리의 인구 30% 정도가 살육 당했다고 한다..
몽골 기병대는 하루에 약 160km 이상을 달렸고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기동성이 좋은 군대였다..
동양의 나라들이 무참히 몽골에게 당했듯이 동유럽 국가들도 순식간에 박살나버렸다..
유럽 사람들에게 몽골은 충격이자 무시무시한 공포 그 자체였다...
유럽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여 몽골에 대한 소문을 들으며 떨었다
당시의 미술작품은 그 어떤 역사책보다 당시 사람들의 공포감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당시 유럽에 퍼졌던 몽골군에 대한 소문 중 하나는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마을 전체를 무참히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비참하게 살육하고, 도시 전체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유럽인들은 난생 보도 듣도 못한 재앙에 당하여 기절초풍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이런 소문을 일부러 조장하고 다녔고 선전선동을 일삼았다
그 다음 몽골 군대에 짓밟힐 도시는 오스트리아의 빈과 프랑스 파리였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는 대책 회의를 열었으나 아무도 제대로 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떨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갑자기 몽골 군대가 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졌고 유럽 사람들은 어리둥절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의 최고 지도자였던 '오고타이 칸'이 병으로 서거했던 것이다
몽골 장군들은 '쿠릴타이'라고 불리는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두 소집돼야 했다
이 회의는 과거부터 유목민들 사이에 존재했었고 최고 지도자를 정하는 일은 정복 전쟁만큼 중요했다
이렇게 해서 몽골의 유럽 원정은 끝났고 유럽 사람들은 기뻐하며 신에게 기도를 했다
기마병이 중심을 이룬 야전에서 탁월한 전투력을 보여준 것에 그치지 않고
공성전 등에서도 유럽 군대보다 우위를 보였는데 그 핵심적 이유는 몽골의 첨단 신무기 때문이었다
불과 수 십년 전 야만적인 부족에서 출발한 유목민들이 어떻게 최첨단 무기를 가졌을까??
1241년 오스트리아 빈의 외곽에서 순찰하던 유럽의 군대는 소규모 전투에서 몽골군 장교들을 생포했다
그런데 그 장교들 중 한 사람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영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영어, 아랍어, 몽골어 등을 구사할 줄 알았던 지식인이었다
이에 대해선 여러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확실히 밝혀진 점은 많지 않다
몽골 군대는 다양한 인종들이 섞긴 혼합군이었다
징기스칸이 정복한 나라의 병사들이 참여한 일종의 연합군이었던 것이다..
몽골군은 다양한 나라에서 인재들을 등용하여 썼는데 대표적인 예가 중국인을 이용하여 첨단무기를 얻었던 사례다
중국을 정복할 때 몽골인들은 중국인들이 가진 공성무기에 감탄했다
몽골 장군들은 자신들의 전투 방식에만 집착하지 않았고 중국의 전술 및 문물을 적극 수용했다
1258년에는 이슬람 최대 도시였던 바그다드를 몽골 군대가 공격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중국인 공병들이 바그다드를 말뚝으로 둘러쌓았고 공성무기로 도시를 공격했었다
바그다드는 몽골의 맹공격을 받고 겨우 10일도 못 버티고 함락 당했다
1268년에 시작된 남송(중국 양자강 이남에서 버티던 송나라)과의 전쟁에서는 반대로 이슬람 기술자들을 이용
남송 지역에는 견고한 성들이 많았고 공성전에서 애를 먹었다.. 그래서 투석기로 맹공격을 해서 함락히켰다
이 때 사용한 신식 투석기는 이슬람 기술자들이 만들었던 것이다
몽골은 정복지에서 항복한 사람들 중에 유능한 자들을 극진히 대우해주었다
초원의 가난한 부족이었던 몽골족을 가장 선진적인 기술을 가지게 했던 힘은 '관용 정신'에 있었다
그 관용을 몽골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은 징기스칸이었다
징기스칸이 태어날 무렵 몽골족은 오논 강가에서 살아가던 작은 부족에 불과했다..
당시에 몽골은 난장판이었고 부족간의 전쟁도 끝이 없었다..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여러 부족이 싸우고, 서로 약탈하고 있었다
대지는 뒤집히고 모든 부족이 싸우고 싸웠다" -몽골 비사-
징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적대적이었던 타타르족에게 암살 당했다
아버지를 잃고 9살에 고아가 된 징기스칸은 친척들에게도 버림 받게 되었다..
징기스칸은 굶주림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했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몽골의 겨울..
여름에 준비한 식량은 겨울에 곧 바닥났었고
징기스칸은 거의 아무 대비도 못하고 간간히 버텨냈다
고난에 찬 징기스칸의 어린시절은 쓰라린 교훈을 주었다..
테무친(징기스칸)은 몇 가지 신념을 철저히 지키게 되었는데
혈연, 출신, 민족, 종교, 국적 등을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의리와 충성심만으로 인간을 평가했던 것이다
징기스칸의 그런 생각은 몽골 역사에서는 없었던 혁명적인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혈연 등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부족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 거부감을 띠지 않았고
타타르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타타르족은 징기스칸이 증오했고, 징기스칸의 아버지를 암살한 원수들이었다
1202년에 있었던 타타르족과의 전쟁은 일종의 보복이었다
아버지의 원수이자 몽골 지역 최대의 강적이었던 타타르족은 결국 처참히 파멸되어 항복한다.
초원의 관행에 따르면 타타르족은 징기스칸의 노예가 되거나 몰살 당해야 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관행을 무시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부족을 이끌어나간다
부족을 하나하나 정복할 때마다 몽골족은 더욱 커졌고 징기스칸에겐 친구들과 부하들이 더 많이 생겼다.
징기스칸의 슬로건은 명백했다
대항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했으며 항복하는 자는 형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버지를 잃고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자란 소년을 강자로 키운 것 중 하나는 패자에 대한 관용 정신이었다
징기스칸은 최대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는데 양아버지에게 뒤통수를 당했던 일이다
구사일생한 징기스칸은 부하 몇몇과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갔고 '발주나 호수'에 도달했다
발주나 맹약은 도원결의를 연상케 하는데, 배신 당한 뒤 징기스칸에게 남아있던 부하는 19명에 불과했는데
이들은 발주나 호수에서 흙탕물을 마시며 과거의 고생을 돌아보며 징기스칸과 결의를 다졌다
19명은 죽을 때까지 징기스칸과 함께할 것을 맹세하며 충성심을 표현했다
이 19명을 살펴보면 징기스칸의 친족도 아니었고 몽골족도 아니었다
같은 몽골족 출신자는 자신의 동생 카사르 뿐이었다..
이들은 또한 종교도 가지각색이었고, 공통점이라고는 징기스칸에 대한 의리 하나 뿐이었다
이 19명과 함께 다시 부족민들을 규합하여 징기스칸은 새로운 제국을 창건할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징기스칸의 군대는 친족집단과는 완전히 무관한 군대가 되었다
이런 징기스칸의 태도는 대를 잇게 되었고 후계자들도 이런 정신을 계승했다
출신, 혈연, 인종에 대한 차별이 매우 드물었고 체계적으로 조직된 군대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