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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확률과 다중우주

과정 2017. 3. 31. 17:06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확률적인 상황과 마주해. 동전을 던질 때 나올 수 있는 경우는 앞면과 뒷면으로 각각이 나올 확률은 50%이지.


오늘이 맑을 확률을 구하는 것도 우리나라 상공의 대기 흐름을 분석함으로써 가능하며 복권에도 마찬가지로 확률이 개입되어 있어.


우리는 어떤 경우에 확률에 의존하게 될까? 특정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에 대해 완벽한 정보를 갖고 있다면 굳이 확률을 도입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정보가 불완전하다면 우리는 확률을 도입해야하지. 흔히 동전던지기를 확률로써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초기조건 즉 위로 던질 때


속도나 방향, 공기의 점성, 동전의 탄성이나 면적 등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동전을 던졌을 때 나타날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어.


허나 대부분의 경우 이같은 많은 정보를 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확률에 의존하게 되는거야.


그렇다면 확률과 다중세계는 도대체 어떠한 관련이 있는걸까? 확률과 다중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양자역학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양자역학의 역사부터 짚고 넘어가야 해.


1. 간단한 역사



20세기 중반, 휴 에버렛은 양자역학을 연구하던 도중 '다중세계'의 도입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아냈어. 그리고 그의 지도교수에게 


이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여 제출하였지. 당시 그의 지도교수는 존 휠러였으며, 휠러는 에버렛의 논문을 보고 깊이 감명받아 당시 양자역학 부문에서


최고의 물리학자로 손꼽히는 보어에게 가서 에버렛의 아이디어를 자문했어. 그러나 보어는 생각보다 싸늘한 반응을 보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휠러는


에버렛의 논문을 기각하며 보어의 반감을 살 내용을 모조리 삭제하지 않으면 박사학위를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어.




에버렛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으려고 했으나, 당시 그가 알아놨던 일자리에서 박사학위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없이 훨씬 완화하여


논문을 제출했어.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거의 없다시피한 평범한 논문이라 세간의 주목을 끌진 못했지.


에버렛의 논문은 '다중세계 해석(Many Worlds Interpretation)'과 관련된 내용으로, 기존의 양자역학체계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야.


초기 논문은 아주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고전적인 양자역학입지를 고수하고 있던 보어의 입장으로선 눈엣가시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거야.


사실 양자역학은 처음 탄생할 때부터 한 가지 불편한 문제가 그 이론의 완벽함에 한 가지 흉터를 남기고 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


바로 휴 에버렛의 평행우주가설이야. 이 양자역학은 20세기 초인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돼.




1925년 4월, 두 물리학자 데이비슨과 저머는 벨 연구소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어. 그러던 도중 뜨거운 니켈덩어리가 갑자기 폭발했어. 사실 실험실에서의


사고는 일상다반사인지라 그들도 그냥 짜증만 내고 실험실을 정리했다고해. 그러던 도중 그들은 변색된 니켈덩어리를 발견했고,


우연이었던걸까 아니면 그저 귀찮아서였던걸까 그들은 이 니켈덩어리를 재사용했어. 그러자 희한한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들은 이 결과를 종합하여


논문을 제출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37년 노벨상을 수상했어. 과연 이들이 보았던 결과는 무엇이였을까? 


이 실험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이야.



전자 총에서 발사된 전자빔은 두 개의 가느다란 슬릿이 나 있는 판을 통과하며 판 뒤의 스크린에 맺히는 실험이지.


이들의 실험 순서는 다음과 같았어. 먼저 이중슬릿 중 왼쪽을 막아 오른쪽으로만 전자가 통과하게 하여 스크린의 영상을 분석하였고, 다음에 오른쪽을 막아


왼쪽으로만 전자가 통과하게 하여 다시 스크린의 영상을 분석, 마지막으로 두 슬릿을 열어놓은 상태로 양쪽으로 전자가 모두 통과하게 하여 스크린에


맺히는 영상을 보는 순서야.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오른쪽만 통과한 전자가 나타낸 무늬와 왼쪽만 통과한 전자가 나타낸 무늬를 합치면 양쪽을 모두 통과한 전자가 나타낸


무늬와 같게 나오리라고 볼 거야. 이들도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결과는 전혀 딴 판이었지. 중앙에서 가장 진한 무늬가 나오고 양쪽으로


어두운 부분, 밝은 부분이 번갈아 가며 나타났던거야.


일반적으로 전자는 슬릿에 비해 그 크기가 엄청나게 작기 때문에 전자의 입장에서 볼 때 두 슬릿 간 거리는 엄청나게 멀지. 전자가 눈이 달려있어서


오로지 한 슬릿만 통과했는데 다른 슬릿의 존재를 알았던 걸까? 마치 전자와 관련된 무언가가 두 슬릿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면


과연 이 '무언가'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이중슬릿으로 맺힌 무늬를 분석한 이들은 이 무늬가 무언가를 닮았다고 생각했어. 바로 '파동'이지.




잔잔한 강가의 두 지점에 동시에 돌멩이를 떨어뜨리면 각각 물결무늬가 생기는데, 이 물결무늬들은 서로 영향을 받아 어떤 곳은 더 높아지고


어떤 곳은 더 낮아지는 이른바 '간섭'이 나타나. 즉 그들은 전자에서도 이런 간섭이 나타난다고 생각했으며, 이 간섭은 전자의 '파동' 때문에 발생하여


그러한 무늬가 나타났다고 생각한거야. 그렇다면 이 파동은 무엇의 파동일까? 물결파의 경우 물 분자가 왔다갔다거리는 형태의 파동이라고 볼 수 있어.


그렇다면 전자도 단순히 왔다갔다 하여 파동이 발생했다고 봐야할까? 


1926년 막스 본은 이러한 전자가 단순히 물리적인 파동이 아닌 이른바 '확률적인 파동'의 형태로 간섭을 일으킨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어.




마루나 골처럼 파동의 값이 큰 지점에서는 입자가 발견될 확률이 높고 그렇지 않다면 낮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야.


즉 전자가 움직이면서 전자의 위치에 대한 확률적인 파동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간섭무늬를 만들어냈다는거지.


이는 전자가 여러 개일때에도 성립하며 전자 하나를 이중슬릿에 통과시킬 때에도 마찬가지로 발생해.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식 설명법이야.


전자 하나의 확률파동이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지나가기 때문에 개개의 전자는 두 슬릿의 존재를 모두 알고있다는 것이지.


2. 양자역학의 문제


하지만 이러한 양자역학식 설명은 몇 가지 질문을 야기했는데, 대표적으로 세 가지 정도가 있어.


첫째, 양자역학이 옳다면 확률과 전혀 무관한 뉴턴식 고전물리학이 별과 행성과 같은 다양한 물체의 운동을 아주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뉴턴의 물리학만 가지고도 대부분 물체의 운동을 훌륭하게 서술할 수 있다.



양자역학자들은 이에 대해 큰 물체의 확률파동은 일반적으로 매우 특별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봤어. 즉 그 부피를 차지하는 공간 내에서 물체의 존재 확률이


'거의' 100%라는 말이지. 이러한 양자역학에 의하면 확률파동은 물체의 크기가 작을수록 넓게 퍼지는 경향이 있으며 전자와 같이 매우 작은 미시적 세계는


결국 뉴턴의 물리학이 적용되지 않고 모든 것이 확률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


둘째, 확률파동은 눈으로 볼 수 있을까? 




보어와 같은 물리학자들은 확률파동을 직접 보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관측행위가 그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어. 바로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이라 불리우는


설명이지. 예컨데 코펜하겐 해석의 대표주자라 불리우는 그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있어. 관측행위는 광자를 그 입자에게 쏘아 반사된


것을 보는 행위이며, 전자와 같은 작은 입자를 보기 위해선 전자와 비슷한 파장의 광자를 발사해야하나 이러한 짧은 파장은 매우 높은 에너지를 갖고 있으므로


일단 전자가 광자에 부딪히면 멀리 달아나게 되어 우리는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있어.


즉 우리가 바라볼 때마다 확률파동이 사라지면서(붕괴되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현실을 보여준다는거야.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을 두고 '달은 언제나 그자리에 있다.'며 관측행위로 확률파동이 붕괴된다는 점을 비꼬았어.


마치 일게이의 머리는 아무도 보지 않으면 덥수룩하지만 누군가가 보기만 하면 그 즉시 대머리로 변한다는 이상한 소리이지.


이러한 해괴망측한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말도안되는 소리였지만 이러한 식의 설명을 통해 실험과 이론값이 매우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이를 수용하기에 이르러.


마지막 셋째, 관측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도데체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확률파동이 우리에게 친숙한 유일한 실체로 변신하는 것인가?


사실 코펜하겐 해석과 같이 확률파동이 붕괴되어 관측지점에 조밀하게 몰리는 형태의 파동함수는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구현될 수 없었어.


보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역시 코펜하겐식 해석을 거론하며 관측행위가 파동을 붕괴시켰다고 설명했어. 그렇다면 이러한 붕괴는 단순히 관측만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예컨데 아인슈타인이 말처럼 쥐가 힐끗 째려보는 것만으로 파동이 붕괴될까? 


휴 에버렛은 양자역학의 이 세번째 문제에 관해 생각하다가 아주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 거야.



3. 양자 다중우주



폰 에버렛은 슈뢰딩거 방정식이 보어의 주장과 같이 관측행위로 붕괴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슈뢰딩거 방정식은 입자의 거동을 서술하는 방정식이야.


즉 그는 관측장비 자체도 입자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전자와 관측장비는 서로 연관되어있어 관측행위 자체로 파동 자체가 붕괴될 리 없다고 생각했지.


대신에 에버렛은 관측장비나 사람의 마음이 서로 다른 여러 개의 현실을 동시에 경험한다는 다중세계적 해석을 주장했어.




바로 이것이 Many Worlds Interpretation이라 불리우는 다중세계 해석이야. 예컨데 우리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고백한다고 치면


우리는 그 여자의 마음이나 심리 상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고백을 '받아들인다' 혹은 '거절한다' 와 같은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각각의 확률을 50%라고 생각할 수 있어.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슈뢰딩거의 수학적 관점으로 보게 되면 두 개의 결과를 선형적(각각을 따져서


하나로 합침)으로 보아야 해. 즉 하나의 결합된 결과로 보는거지. 이 결합된 결과는 고백을 받아들인 것과 고백을 거절한 것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각각을 따져 하나로 합치는 선형적 관점


에버렛은 이러한 두 관점이 관측이 실행되기 전에는 하나의 결합된 상태로 존재했으며, 우리가 어떠한 행위(관측이나 위와같이 고백하는 경우)를 함과 동시에


두 세계(고백을 받아들인 세계와 거절당한 세계)로 분리된다고 봤어. 즉 두 개의 실체가 공존한다는 뜻이며 이는 두 개의 우주가 공존한다는 뜻이기도하지.


그러나 각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결과만이 나타날 뿐이어서 일상적인 삶이 그대로 유지돼. 특이한 점은 이렇게 느끼는 우리가


나 하나가 아니라 다른 우주의 나 까지 둘이라는점이지.


만약 고백했을 때 위의 두 가지 단순한 경우 외에도 잠시 생각을 해본다거나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냥 도망치는 경우 등 여러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고백을 하는 순간 각각의 경우에 해당하는 우주로 갈라지며 각각의 실체는 오직 하나의 결과만을 배정받게 돼.




에버렛의 이론에 의하면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건은 즉 양자역학적 확률이 0이 아닌 사건은 분리된 세계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실현된다고해.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이 낳은 다중세계, 즉 양자 다중우주(Quantum Multiverse)라고 불리는 이론이야.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 과연 이 양자 다중우주는 모든 가능한 우주가 실존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행위를 기준으로


존재했다가 다시 하나만 남고 사라지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자 에버렛은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우주는 실제로 존재하며 이들 중 그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다고


후주를 달았다고 해.



4. 양자 다중우주가 가진 문제



양자 다중우주는 기존의 양자역학이 가지는 문제들을 훌륭히 설명해냈으나, 한 가지 문제를 야기했어. 바로 '확률' 이라는 것의 개념이지.


양자 다중우주에 의하면 모든 가능한 경우는 다른 세계에서 발현된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것의 확률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예컨데 동전을 던져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각각 0.5인데, 하나의 세계에서 앞면이 나오고 다른 세계에서 뒷면이 나온다면, 그리고 이 결과를 바라보는


나 자신도 두 세계에 모두 존재한다면 확률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라는걸까? 기존에 제기한 0.5라는 확률은 양자다중우주라는 이론 앞에서 


더이상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거지.




몇몇 게이들은 다중세계에 여러 명의 내가 살고있다고 해도 그들 중 가장 현실에 가까운 내가 존재하며 확률적 예견이 적용되는 대상은 바로 진정한 나일


뿐이라고 생각할수도있어.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다중우주 접근법에 완전히 위배돼. 양자 다중우주는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따르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은 없으며 어느 한 사람이 진정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코펜하겐식 해석 즉 관측으로 파동이 붕괴되는 방식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의미야. 아인슈타인은 모든 입자의 전체적인 확률파동이 오직 슈뢰딩거 방정식으 따라 변한다는 수학적 관점을 취했어. 그렇기 때문에


불확실성으로 도입되는 '확률'이라는 것 자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거지. 즉 아인슈타인 생각처럼 '신은 결코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아직까지도 이와 관련된 문제들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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