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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벌벌떨게한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을 간략히 소개할까 해
시간은........ 1265년으로 거슬로 올라가
1265년 - 몽골 제국의 5번째 황제인 쿠빌라이 칸은 남송을 조지고 있었어.
그때, 고려 출신인 '조이(趙彛)' 가 한가지 제안을 하게돼
조이 : "일본은 남송과 교류도 잦고 친한데 일본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여서 남송을 고립시키는게 어떻슴?
그리고 카더라에 의하면 일본은 황금이 많이나서 길바닥에도 황금이 널려있다덥니다ㅎㅎ"
쿠빌라이 : "오 좋은 조언이다. 고려가 일본과 가까우니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라는 국서를 전달하는 길 안내하라고 해라"
고려 재상 이장용(李藏用) 은 이것이 고려에 큰 화를 부를 것을 감지하고
이장용 : "아........ 이빨을 털어서 일단 막아봐야 겠다......"
대륙에서만 살던 몽고 사신들이 바다에 어두운것을 이용.
일본까지 바닷길이 험하다고 몽고사신들을 겁을 줘서 거제도만 갓다가 되돌아 가게 만들지만
쿠빌라이는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1268년 다시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일본까지 건너가서 국서를 전달해
그당시 일본 교토의 천왕은 가마쿠라 막부에 밀려 무늬만 유지하고 있었어
아무튼 몽고의 조공 국서를 받은 가마쿠라 막부는 무슨 근자감인지
"ㅈ까" 하고 5개월이나 몽고사신을 돌아가게 못하게 해
이후 몇차례나 일본으로 사신을 보냈지만 가마쿠라 막부는 쌩까.
쿠빌라이 : "이 쪽바리 새끼들이......... 말로는 안통하는 구나"
쿠빌라이는 이때부터 일본정벌 계획에 다시 박차를 가해.
1272년 제주도에서 끝까지 항전하던 삼별초가 일본원정을 떠났을때
통수치는 일이 없게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해ㅠㅠ
1274년 고려는 전선 900척을 준비하라는 쿠빌라이의 명령이 떨어져.
몽고앞잡이 고려인 '홍다구(洪茶丘)' ㄱㅅㄲ의 악랄한 독촉으로 고려는 4개월만에 전선 900척을 준비해
홍다구 새끼때문에 죽어났을 고려백성을 생각하니 정말 눈물이 광광우럭따ㅠ
전선 300척, 상륙소형선 300척, 보급선 300척 = 총 900척을 4개월 만에 준비한 고려는
지휘관 흔도(몽), 홍다구(개새끼), 유복형(송), 김방경(고려)
몽골군 2만5천 + 고려군 8천 + 고려 뱃사공 6700명을 대리고
1차 원정 (1274년 10월 3일)을 감행해
1차 2차 원정 모두 후쿠오카가 있는 일본 기타큐슈로 정벌을 나가
1274년 10월 5일
여몽연합군 출항 2일째 대마도를 들려 단 2시간만에 대마도를 초토화 시켜
이어서 10월 14일 이키섬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에 맞서 슈고 타이라노 카게타카(平 景隆)가 항전하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가마쿠라 막부에게 전령을 보내 위급함을 알리고 자결해
10월 17일, 여몽연합군은 다카시마의 아오우와 후네가라쓰에 상륙해.
막부 무사들이 급히 다카시마에 상륙해 산성을 구축하고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이였어..
10월 19일
하카타만(후쿠오카)에 정박한 여몽연합군은 3개 방면으로 나누어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해
이에 다이자후 총사령관의 동생 '쇼니 가케스케' 가 군사 1만 7천명을 이끌고 30Km의 해안 방위선을 구축해 대항하지만
(다이자후 : 큐슈지방 지방군 사령부)
10월 20일
결과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에 초토화 당해.
김방경 : "몽고군이 전투에 익숙하긴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낫겟는가"
라고 자신감도 내비쳐
하지만 일본의 항전도 만만치 않았는데 '쇼니 가케스케'의 화살에 몽고 지휘관 유복형이 전사하게 돼.
선봉은 고려군이고 (힘없는 고려는 소위 고기방패 ㅠ) 뒤가 몽고군이야
일본군의 전투방식은 후진국 그 자체였는데 전투를 알리는 북소리가 나면 장수한명이 나와서
자신의 가문, 이름, 전적들을 알리며 삼국지 게임에나 나올법한 소위 말하는 1:1 일기토 형식으로
전투를 전개하던 방식이야.
결과는????
여몽연합군 : " ?????미친놈이네 완전, 걍 뒤져라 "
홀로 적진으로 달려오는 일본장수는 그냥 다구리맞고 벌집되는거다
그리고 왜군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거리 200m인 고려의 단궁과 원나라의 철포에
전투방식, 무기, 숫자 모든게 열세인 왜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수 밖에 없었어
파죽지세의 여몽연합군은 다이자후 미즈성으로 퇴각한 일본군을 쫒지 않았는데 이유는 몽골새끼들 때문이야
몽고지휘부 : "일본군이 자꾸 패하고 퇴각하는 것이... 다른 매복이나 전략이 있는것이 아닐까?"
고려지휘부 : "ㅡㅡ 좆본새끼들은 원래 하등국가라 지는게 당연하다"
몽고지휘부 : "흠 아무리 그래도 수상하다. 전선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자"
고려지휘부 : "안된다 추격을 계속해야한다. 다이자후가 바로 코앞이다"
몽고지휘부 : "ㄴㄴ 좀 쉬자"
결국 10월 20일 여몽연합군은 전선으로 다시 철수해
그날 새벽. 하카타만에 태풍이 몰아 쳤고
900척의 전선중 몽골 200척의 전선이 침몰하게 되고
고려의 좌군부사 김선(金銑)이 익사, 연합군은 전투는 더이상 무리라고 판단하고..... 고려로 철수해
4만여명이 출병하였지만 돌아오지 못한 자가 1만3500명이나 되었다고 해
당시 일본은 봉화제도 및 역마체제도 낙후되있던 터라 1차 원정이 끝나고 8일뒤인 10월 28일에
여몽연합군의 침공 소식이 가마쿠라 막부로 알려지게 되고
이후 일본에서는 여몽연합군을 물리쳐준 태풍을 가르켜 신이 불어준 바람 신풍(神風) 카미가제 라고 부르면서
병신같이 소식도 모르고 태풍으로 운좋게 여몽연합군을 막아넨 가마쿠라 막부는 또 자신감이 한껏 충만해
그리고 혹시 다시 있을 침공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지.
1차 원정 사령관 흔도는 태풍때매 졌다는 소리는 안하고 일본군 패퇴시킨 전과만 보고하고 숨겨
쿠빌라이 : " 이정도면 일본이 알아들었겟지? 조공하라는 사신을 다시 보내라!!! "
가마쿠라 막부 : " 응 ㅈ까 "
1257년 1차 원정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가마쿠라 막부는 고려인 수행원만 빼고 몽고사신단을 전원 참수해 버려
이에 빡친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다시 원정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려.
충렬왕 : " 하.......쿠빌라이 ㅆㅂ새끼.... 어차피 똥꼬집 못꺾으니... 한번더 도와주고 얻을것좀 얻자...."
(쿠빌라이는 충렬왕의 장인어른이기도 하다)
쿠빌라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충렬왕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2차원정 준비에 나서고
대신 평소 ㅈ같았던 홍다구새끼를 쿠빌라이한테 앙망하여 원으로 보내버린다
1280년 동로군과 강남군으로 된 2차 원정 병력이 꾸려진다.
동로군 : 몽고 1만, 고려군 2만, 고려 뱃사공&일꾼 1만 7천 (전선 900척, 군량 12만 3000천석)
강남군 : 송나라 개찌끄레기 농민병사 10만
쿠빌라이가 강남군을 보낸 이유는, 기본적으로 남송인을 노예로 삼고 가장 천대하고 차별했는데
송나라의 세력이 다시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기방패로 내세웟어
1281년 5월 여몽연합군은 1차 원정때와 같은 루트로 재 침공한다.
5월 26일 이키섬을 또 초토화 시킨뒤
6월 6일 하카타만으로 또 이동한다
하지만 일본새끼들이 완전히 병신은 아니였는지, 하카타만 해안 20km구간을 2m 높이의 방벽을 처놨어
같은 루트로 온 병신같은 여몽연합군은 방벽에 가로막혀 인근 시카노 섬으로 이동해
하지만 일본이 죽기살기로 덤비고 몽고군이 잘 못싸우는 바람에
살짝 고전하긴 했으나 선전하는 고려군 덕분에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헌데 문제가 생겼어
원래 강남군 10만과 이키섬에서 연합하여 다시 하카타만을 공격하려 했던 동로군은
ㅄ같은 송나라 강남군이 엉뚱한 대로 갔다 오느라 보름이나 연합이 늦어 버렸어
7월 27일 드디어 강남군과 합세한 여몽연합군은 4000척에 달하는 전선의 위용을 뽐내며 하카타 만으로 진격해
막부군은 그 위용에 놀라... 덤비지도 못하고 소극적으로 기습전만 벌이며 시간을 끌어
하늘은 또 좆본의 편이였는지, 늦어버린 강남군 개새끼들 때문인지
7월 30일 또 태풍이 불어 닥처서 연합군 함대는 초전박살이 나버려....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육지로 올라온 병사들은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참혹하게 도륙당해
몽고병사와 고려병사는 참수당하고 남송인들은 노예로 삼아 (남송은 어딜가나 노예)
1차 원정때는 4개월이란 짧은시간에 만든 배라 태풍을 견디지 못했지만
2차 원정때 고려가 만든 함선은 좀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원정에 참가한 고려인 26,989명 중 19,379명이 살아 돌아와
몽고 1만과 남송10만은 거의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
1차와 2차 원정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쿠빌라이의 일본정벌의 야욕은 끝나지 않았어
다시 고려를 쥐어짜서 배를 만들면 되고, 남송인들을 대려다가 고기방패로 삼으면 됬으니까...
하지만 곳곳에 내란이 일어나고 배트남 정벌을 신경쓰느라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1294년 80의 나이로 숨을 거둬
여몽연합군의 침략이 끝나고 일본의 많은 무사들은 빚까지 지며 죽기살기로 고생했는데
땡전한푼 받지못했고, 불만이 쌓여 내분이 일어나게 되고 여몽연합군의 침략을 막아넨 가마쿠라 막부는 망하고 말아.
한번도 외적의 침입을 받아본적 없는 일본은
카미카제를 존나 빨게되고
여몽연합군은 트라우마로 남게되어. 규슈지방에서는 아기가 울면
"무쿠리(몽고)와 고쿠리(고려)가 잡으로 온다" 라고 말할 정도였어
또 전쟁기간중 여몽연합군은 일본에서 방화, 약탈, 학살을 엄청했는데
강간당하는 여자가 반항하면 손을뚫어 고리를 꿰어 끌고다니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고, 어린아이들의 사지를 찢는 등 역시....무예의 나라 갓고려
물론 몽고군이 더 악랄했을거..야
여몽연합군이..주도적으로 이루어 진건 아니였지만
1차 원정이 성공했었다면 기타큐슈 점령을 발판으로 교토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을 텐데
우리 역사상 일본 본토 침략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였을 기회, 무척 아쉽다
추가로
몽골 제국은 아이누 족이 살던 사할린 섬을 타타르 해협을 건너 1264, 1284, 1285, 1286년에 침공하기도 했다
원사 세조본기에 따르면 1만의 병력을 투입했다고 하는데, 몽골군은 겨우 2만 병력으로도 러시아 공국 연합군 8만을 탈탈 털어버릴 만큼
당대 기준으로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아이누인들에게는 가히 외계인의 침공이나 마찬가지의 날벼락이었다
몽골군은 사할린에 거점을 확보하고 둔전을 일궜지만 아이누들의 저항이 의외로 강력했고
하필 1287년 몽골 본국에서 난이 일어나기도 해서 사할린 지배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고 조공체제를 유지했다
원명대의 지도를 보면 사할린과 홋카이도, 일본이 쭉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몽골은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걸 만약 알았다면 여기서 도호쿠 방면으로 남진하면 태풍 영향도 거의 없고 몽골 본토에서도 더 가까운 침공루트인데다
겨울에는 타타르 해협이 얼어붙어서 걸어서 건널 수도 있기 때문에 이쪽 루트로 침공을 고려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리 지식의 부재로 실현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