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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박정희의 유신체제

과정 2017. 5. 14. 08:16


인간을 평가할 때 지식인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공과 과를 공평하게 봐야된다!


1. 유신이란 무엇인가? 


유신이라는 용어의 뜻은 유교 단어로, "새로 고친다"라는 의미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탱크를 앞세워 헌정을 중단시키고, "냉전에서 긴장완화로 가는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신속한 적응, 남북의 평화적 통일 성취 그리고 낭비와 비능률을 배제할 수 있는 "한국적 민주주의" 정착"이라는 명분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단체를 구성해 새로운 유신 헌법을 제정하였어.


유신 체제가 왜 권위주의 독재라고 불리냐면

1) 유신체제 하에서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연임 제한 X)

2) 자신을 행정부의 수반이 아닌 입법,사법,행정 3부 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인 권력자로 부상시켰으며 (국회 해산권을 가졌음)

3) 국회의원들의 1/3은 선거가 아닌 대통령의 추천으로 선출되게 하여 박정희의 영구독재를 사실 상 제도화했어.


이 전 박정희의 5.16 군사혁명은 불만에 찬 장교집단들의 집단적 프로젝트였던 것에 반해, 유신은 박정희의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강했다.

유신은 박정희와 그를 둘러싼 최 측근들이 밀실에서 비밀리에 만든 작품이었고, 대내적으로 JP계가 몰락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간섭이

줄어들던 시기여서 박정희는별 다른 저항 없이 유신체제라는 독재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거지.


2. 왜 유신을 하였는가?


1)민족적 민주주의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어. 아니 싫어했어.


"우리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옷을 빌려 입었는데 우리 몸에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우리 몸에 맞추어 입어야 한다. 이것을 나는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83쪽


유럽에서의 민주주의는 아래에서부터의 혁명으로 민중들이 직접 쟁취한 것이어서 전통성이 있엇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미 군정 시절 미국으로부터 시혜적으로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기에, 민주주의의 정통성이 결여되었고, 따라서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았었던 거야.

그래서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시각에서 보면, 이승만 체제부터 외피로나마 유지해왔던 민주주의체제가 "한국인에게 잘 맞는 옷"으로 갈아 입혀지게 된 일련의 혁명인 것이지.


그렇다면 박정희가 새로 갈아입으려 했던 "새로운 옷"은 무엇일까?

박정희는 아무래도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모델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야.


"일본이 명치유신이란 혁명과정을 겪고 난 지 10년 내외에...극동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실로 아시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박정희, <국가 혁명과 나> 167쪽


일본의 명치유신 체제는 천황을 중심으로 군부와 혁신적 관료들의 엘리트주의적 지배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바로 이 명치유신 체제를 자신의 정치 모델로 삼았던 것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매도할 수는 없어, 

일본 메이지유신의 성공은, 괄목 할만한 것이 사실이고 아시아 국가에서 다른 대안적인 모델은 없었으며,

서구와 같은 정통성있는 절차를 밟지 못하고 미국에 의해 외삽적으로 근대화되었던 일본의 사례는

마찬가지로 미국에 의해 민주화 되었던 한국의 과거와와 공통점이 많았기에

박정희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친일파 행위라고 매도할 수는 없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다들 알고있자.



2)안보위기


유신체제의 수립은 국제적 냉전체제의 이완기에 이루어졌어. 

월남전으로 정점에 달했던 냉전체제는 미국이 월남전에서 실패를 자인하고, 중공과 소련과의 관계 개선과 화해를 시도함으로써

급격히 이완기에 접어들고 있었어. 이 이완기에 미국은 '아시아에서 발 빼기 정책'을 시작하였고 이는 닉슨독트린1)으로 구체화 되었지

1)닉슨독트린=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이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이때 주한 미군 철군이 시작되었어, 1971년 3월에서 7월 사이 2만 명의 주한 미군이 철수하였는데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 또한 공격적인 대남 군사노선을 타기 시작하였고 무장게릴라 습격, 무장공비 침투, 군함 피랍등 다양한 형태의 무력도발이 이어졌기에 박정희 입장에서는 "안보 강화" 차원에서 자신의 권력강화가 필요했던 것이었지.


그래서 유신체제가 들어오고나서, 박정희는 250만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고, 학생들을 학도호국단으로 조직,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방위산업의 육성을 추진하여 유신체제를 위한 군사적인 기초를 쌓아, 마침내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 같은 달 2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하여 비상대권을 가진 일인독재 체제를 결국에 수립하게 되. 

대외적인 국제정세 변화 -> 북한의 대남도발 증가 -> 박정희 군사력 강화 -> (이를 명분으로) 유신체제 설립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다.


3) 중화학공업화



유신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중화학 공업과 유신의 인과관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어.

박정희 시절 초반에 경제 원동력이었떤 "비내구성 소비재 중심"의 수출지향적 산업화는 커다란 성공을 불러일으켰지만

1970년대 초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같은 후후발산업국에게 추격당해서, 한국의 경제는 커다란 위기를 겪게 되었지.

그래서 자연스럽게 1970년대 초반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소비재 중심의 산업구조라는 1차 산업에서 중화학 공업이라는 2차 산업으로에의 전환이

필요했었고, 이런 전 국가적 산업구조의 혁신은 필연적으로 "권위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필요했다는 구조결정적인 주장이야.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아.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구조결정적인 이론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어.

"구조로 역사를 바라보면 쉽다. 하지만 구조는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라 "제약하는 요인"이고 역사는 구조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역사다."

이 처럼 나는 유신체제가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던 권위주의 체제라는 사회과학자들의 주장엔 동의 할 수 없어.

나는 유신체제의 어느정도는 박정희 자신의 야욕과, 권력욕을 충당하기 위해 벌여진, 쿠데타이며 민주주의의 퇴행을 야기했던 그의 분명한 과오라고 생각해.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경제 기반을 건설한 대통령이었지만, 동시에 이렇게 어두운 그림자도 역사에 남긴 대통령이셨지.

다만 선동에 의해 잘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겉모습만 보고 투표하거나 지지하는 경우가 과거나 현재나 많은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발전이 엄청 늦춰지고 중요한 타이밍에 실행해야할 정책을 하지 못한데다 북한의 간첩, 방해공작 등으로 성장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겠지.

더군다나 옛날엔 못배운사람이 많아서 더욱 국민들의 선견지명이 낮았어. 참 여러모로 아쉽기도 하고 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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