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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혹시 아이누족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아이누족은 인도 혹은 폴리네시안 계통으로 추정되는 고인종으로
오랫 동안 일본의 훗카이도 등지에서 아시아의 주류였던 황인종과는
별개로 살아왔던 토착민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된 일본 중앙정부의 탄압과 확장정책에 의해 아이누족은
차츰 사라지고, 그 후손들도 지금은 모두 일본인과 동화 해버려서, 더 이상 진짜
'아이누족'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 문화의 흔적이라면 관광지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17세기 조선인이 그들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지금 소개하고 싶은 얘기는 조선 숙종 대(1696년)에 그만 일본의 훗카이도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이지향이란 인물의 이야기이다.
사실 그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이야기를 남긴 표주록(표류한 배의 기록)은 의외로 유명할 수도, 또는 유명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글의 길이 조절을 위해 생략한 내용도 많고, 또 내 개인의 추측으로 (이를테면
표주록은 "몇일 뒤" 식으로 쓰여있어 날짜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없다.) 채워넣은 내용도 있으니 더 정확하고 자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맨 밑에 올려놓은 고전번역원 링크를 타고 전문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모험기는 숙종 대 평범한 양반이었던 이지향이 부산에서 경북 영덕으로 가기 위해 삯을 내고 상선(商船)을 얻어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선달(李先達)은 이름은 지항(志恒), 자는 무경(茂卿)이다. 선조는 영천 출신의 학자로 동래부에 살아왔다. 을묘년 별시에서 무과에 급제하였다.
(중략)
병자년 봄에, 영해(지금의 영덕)에 왕래할 일이 있었던 차에, 부산포 사람 공철(孔哲)ㆍ김백선(金白善)이, ‘읍에 사는 사람 김여방(金汝芳)과 어물(魚物) 흥판(興販 물건을 한 번에 많이 흥정하여 매매하는 일)을 같이 하는데, 배를 타고 강원도 연해의 각 고을을 다니려면 그곳을 지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서 말의 쌀과 돈 두 냥(兩)을 가지고 뱃머리에 이르러 노복과 말을 돌려보냈다."
여기서 이선달이 얻어탄 배는 어물 따위를 매매하며 부산에서 출발해 강원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동해상의 연해를 연결하는 나름의 교역 루트가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업은 당대로선 상당히 짭짤한 수입원이었던 모양이다.
단순한 사공과 선원들 외에 위에 언급된 공철,김백선,김여방은 하급무관 출신으로 직장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공철은 경험이 많고 일본에도 자주 왕래했던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탄 배는 아마 이런 형태의 배였을 것이다.
병자년
4월 13일
순풍을 타고 배가 출발했다.
4월 28일
바람이 조금 순하게 불기에 배가 나아갔다. 오후 4,5시 쯤에 횡풍이 크게 일어나 파도는 하늘에 닿을 듯하고, 배의 미목(尾木)이 부러지고 부서져, 거의 빠지게 되었다. 노를 대신 질러 비록 물속에 빠져 죽는 것은 면했지만 횡풍으로 대해에 떠밀려 밤새도록 표류했다.
4월 29일
아침에 보니, 끝이 없는 큰 바다 가운데에, 다만 사방이 구름에 덮여 있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막막할 뿐, 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배에 걸쳐진 나무에 허리를 매고, 비옷을 덮어 몸을 가렸다. 기력이 이미 다하고 정신이 혼미하여져, 저도 모르게 쓰러져서 잠들어 마치 이미 죽은 사람들과도 같았다.
억지로 일어나 허리에 묶은 것을 풀고 서서 보니 사방은 안개로 가리워져 있고, 바닷물이 치솟았다. 배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지 해가 돋는 곳을 보고 동방을 알았으니, 배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축인방(7,8시 방향)인 것 같았다.
이 선달은 조금이라도 편히 가보자 해로를 택한 모양인데, 운이 없게도 부산포를 출발한 지 15일 만에
풍랑을 만나 미목이 파손되고 만다. 여기서 미목이란 후미 일부, 혹은 방향키가 아닐까 한다.
덕분에 배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 채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밀리고 만다.
조운선은 연안을 오가는 용도로 짐을 많이 싣기 위해 평평한 형태로 제작된 배이다.
따라서 원해에서의 항해는 적합치 않았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그는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이어서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자.
5월 6일
물이 다 떨어졌다. 작은 꾀를 시험해 보려고 생각하여 바닷물을 솥에 담아 솥뚜껑을 거꾸로 닫고 소주(燒酒) 내리듯이 하여 솥뚜껑에 겨우 반 사발 가량의 증류수(蒸溜水)를 받았는데, 그 맛이 과연 담담하였다. 그것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먹여 약간 기갈(飢渴)을 풀게 했다. 그 후로 번갈아 가면서 불을 지펴 증류수를 받아 먹었다.
표류되는 동안 이선달 일행은 물에 불린 생쌀을 씹어먹고 바닷물을 끓여 증류수를 먹으며 버텨나간다.
5월 8일
우리는 큰 바다 복판에서 이리저리 표류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느 날에나 정박할 수가 있는가를 점쳐 보았더니, 풍뢰익괘(風雷益卦 64괘의 하나)를 얻었는데, 모름지기 길(吉)하고 이익이 있으리라.’ 하였다고 달래니, 사람들이 다 답답한 근심을 조금 풀었다. 바람은 3경쯤에 이르러 그쳤다가, 동방이 밝아지며, 곧 이어 서풍이 불어왔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전에 내가 일본 지도를 본 일이 있었는데, 동쪽은 다 육지였다. 또 통신사를 수행하여 왕래했던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 중간에 대판성(오사카)이 있어, 황제라는 자가 있고, 동북방 강호(江戶)라는 곳에는 관백(關白)이 있다. 대판성에서 육지로만 이어져 강호까지 가는 데는 16~17일이 걸린다.’ 하였다. 이제 우리는 동해가 다하는 곳까지 가면 반드시 일본의 땅일 것이니, 이는 하늘이 도운 요행이다.” 하니,
선인(船人)들은 다 말하기를, “끝내 육지를 못 만나니, 이건 틀림없이 텅 빈 큰 바다와 통해 있습니다.”
하고는, 다들 하늘을 부르고, 부모를 부르며 통곡하였다.
밤 2경 쯤에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파도가 치솟아 뱃전에 부딪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자, 모두들 다 엎드려
빌었는데, 꼭 죽는 것만 같았다.
망망대해가 계속되자 일행은 멘탈이 붕괴한다.
점도 쳐보고 육지에 닿을 수 있다고 희망적인 얘기도 해 보지만
선원들이 굳센 일게이였는지 씹선비님의 발언은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5월 12일
오후3시 쯤에, 배 앞에 태산과 같은 것이 비로소 보였는데, 위는 희고 아래는 검었다.
희미하게 보이는데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점점 가까이 가 살펴보니, 산이 푸른 하늘에 솟아 있어 위에 쌓인 눈이 희게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아가 정박하려는 사이에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배는 동요하여 안정되지 않고,
주림과 갈증으로 기력이 없어진데다가, 파도가 배를 쳐 배 안에는 물이 가득해져서 거의
뒤집혀지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일시에 배를 움직이며, 작은 두 개의 통으로 물을 퍼내어,
물에 빠져 죽는 것만은 면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옷이 다 물에 젖어 추워 덜덜 떨었다. 겨우
물이 얕은 굽이진 곳을 찾아 정박하고는 비옷을 덮고 밤을 지냈다.
아침에 육지를 바라보니, 산이 중천(中天)에 솟아 있는데, 중턱 이상에는 눈이 가득 덮여 있고
그 아래로는 초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사람 사는 집은 없고, 다만 산기슭 밑에 임시로
지어 놓은 초가 20여 채가 보일 뿐이었다. 가서 그 집들을 보니, 집 안에는 무수한 물고기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고기는 거의 대구(大口)ㆍ청어(靑魚)였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기타 잡어
(雜魚)는 건포를 만들려고 많이 매달아 놓았다.
선인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삶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잔뜩 마셔서 배를 북처럼 해가지고는
곤히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대로 그곳에 배를 정박시키고, 배에서 내려 비옷을 덮고서
자는둥 마는둥 밤을 지냈다.
곧 죽는 줄로만 알았던 이선달 일행은 표류 2주 만에 드디어 육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날쌔게 정박해서 빈집털이부터 함 ㅋ
꼭대기에 눈이 덮인 산은 흔치 않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그가 어느 섬에 정박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바로 리시리섬(利尻島)이란 곳이다.
과연 바다 한 가운데 산이 우뚝 서 있어서 눈에 띄이는 지형이다.
다시 이어지는 5월 13일의 기록으로 돌아가서.....
5월13일
아침 해안으로 올라 가, 연기 나는 곳을 살펴 인가를 찾아보았더니, 서쪽으로 10리쯤의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도는 곳에서 연기가 제법 떠올랐는데, 인가에서 밥을 짓는 연기같이 보였다.
곧 배를 이동시켜 나아가면서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7~8채의 인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소금
고는 사람들의 소금 고는 곳과 매우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고기잡이 하는 해부(海夫)인 왜인의
움막일 것이라 여기고, 미처 배를 정박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대여섯 사람이 선창(船艙)으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누른 옷을 입었고,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우리들은 모두 놀라, 배를 멈추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선인들로 하여금 불러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묵묵히 서로 바라다보기만 하였으니, 그들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이어서 이처럼 묵묵히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들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일본인들은
아니고, 끝내 무엇들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더욱 놀라고 공포에 떨었다. 그들 중의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하였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교환하지 못한 채 다만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선달 일행은 섬의 원주민에게 일본어로 소통을 시도했지만, 일본어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었다.
이선달이 정체를 알 수 가 없다는 그들, 그가 만난 섬의 원주민은 다름 아닌 아이누족이었다.
아이누라면 보통 아무리 원시적 생활을 지속했다 하여도 최소 옷가지 정도는 갖춰입은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만, 확실히 아이누족도 제각각이었던 것 같다. 이 선달이 만난 부족은
훗카이도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해 딱히 교류없이 살던 사람들이니 그 모습은 꽤나 이국적이었을 것이다.
그중 한 늙은이가 손에 풀잎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삶은 물고기 몇 덩어리가 있었다.
이어서 그들의 집을 가리키고 고개를 흔들며 야단스럽게 지껄이고 있었는데, 우리를 자기들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자 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심히도 공포에 떨어, 멀리 피하고 싶었지만 방향을 분별할 수가 없었고, 달아나 보았자 갈 곳이
없었다. 부득이 죽기를 각오하고 배를 저어 가 정박하였고, 그곳 선창의 뱃사람들과 일시에 하선(下船)했다.
(중략)
그들이 강한가 부드러운가를 시험해 보니, 모양은 흉악하게 생겼지만, 원래 사람을 해치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나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드리는 것을 보고 살해를 하지 않는 것들이라 알고는, 놀라고 무서워
하는 마음이 점점 없어졌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무수히 만들어 놓아 물고기를 숲처럼 걸어 놓았고, 고래의 포(脯)도 산더미처
럼 쌓여 있었다. 남녀가 혹은 나무 껍질로 짠 누른 베의 긴 옷을 입었고, 혹은 곰 가죽과 여우 가죽 또는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었다.
그들의 머리털은 겨우 한 치[寸] 남짓하였고, 수염은 다 매었는데, 혹은 한 자[尺] 혹은 한 발이나
되었다. 귀에는 큰 은고리를 달았고, 몸에는 검은 털이 나 있었다. 눈자위는 모두 희고, 남녀가
신과 버선을 신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본시 글자로 서로 통하는 풍습이 없고, 피차 말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시험삼아 해 보였더니,
다만 어탕(魚湯)을 작은 그릇 하나에 담아 줄 뿐, 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만국공통어는 역시나 바디랭귀지인 모양이다.
의외로 이 원주민들은 선뜻 식량도 내어 줄 만큼 친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은 이들 에조인들은
본토에서 진출한 야마타이계 일본인들과 군사적으로 충돌한 후 주종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에,
큰 배를 타고 온 이 선달 일행을 본토 왜인으로 착각하고 친절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날이 저무니, 그들은 또 어탕 한 그릇과 고래 포 몇 조각을 주는 것 외에는 끝내 밥을 짓는 거동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호의에도 불구하고 메뉴가 오직 생선 포와 어탕 뿐이라 이선달 일행은 약간 실망한 듯 하다.
“천하의 인간은 다 곡식밥을 먹는다. 이 무리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터이니, 어찌 밥 짓는
풍속이 없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우리 여러 사람의 밥을 먹이는 비용을 꺼리고, 쌀을 아끼느라
이처럼 밥을 짓지 않는 것이다.” 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가서 밥을 짓는가를 알아 보았더니, 모두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어탕에다
물고기의 기름을 섞어서 먹고 있어서, 그들이 본시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배에는 쌀이 떨어졌기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여행용 그릇을 내보이면서 쌀을 달라고 청해
보았지만, 대답할 바를 몰랐다.
나는 쌀알을 가리켜 보였지만 머리를 흔들고는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무리는
정말로 쌀이나 콩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어탕이 어지간히도 입에 맞지 않았는지, 이선달은 "쌀도 떨어져 가는데 이러다 굶어죽겠다.
이제 배는 채웠으니 배를 타고 나아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가 보자." 라는 제안을 한다.
선원들은 모두 동의하고 다른 육지를 찾아 나선다.
일시에 배를 저어, 한 작은 바다를 건너가 정박하였더니, 거기도 역시 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을 가리키며 땅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다만 제모곡(諸毛谷)이라 하였다.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시늉을 하니, 그들은 또 작은 그릇에 담은
어탕을 줄 뿐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염원하던 쌀밥은 얻어먹지 못 한다.
어탕은 그 일대 원주민의 주메뉴였던 모양이다.
순풍을 타고 30여 리를 옮아 가, 어느 한 곳에 정박했는데,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땅 이름을 물으니
점모곡(占毛谷)이라 하였다. 그들의 말은 이같았으나, 그들이 무슨 말로 알아듣고 대답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대구와 청어를 달라고 청했더니, 삶아 먹도록 많이 주었다. 그곳에는 벚나무 껍질이 많이 있어서,
그것으로 횃불로 사용하니, 불꽃이 아주 밝았다. 산모퉁이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동남간에 긴 육지가
있는데 산이 창공에 솟아 있어, 그 지세는 큰 육지같이 보였다. 그곳을 가리켜 물었더니, 다만 지곡(至谷)
이라고만 했다.
거리를 가늠해 보니, 불과 30여 리밖에 되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건너갔는데, 종일토록 댈 수가 없었다.
바닷길의 원근에 대한 짐작은 육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곳에 배를 대니, 역시 앞에 나온 무리들과
같아서 그들의 언어를 알 수 있는 방도가 없고,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물고기만 얻어 먹는 것이었다.
옮겨간 곳에서 유숙을 하고 하루가 지난다.
이선달은 나무를 해다 배를 수리하고 나아갈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나무를 하러 올라간 언덕에서 재미있는 발견을 한다.
“미목(尾木)을 갖추고 말린 생선을 얻고, 물을 길어 배에 싣고서 표류하여 온 방향으로 똑바로 가, 요행히 우리의 땅에 도달한다면 살 것이고, 바다에서 역풍(逆風)을 만나, 이리저리 표류하여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불행하게 될 것이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굶주린 사람들을 데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한 큰 참나무를 찍어서 미목(尾木)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꽂을 구멍이 있는 널판을 견고하게 만들 생각이 나지 않아, 배로 가져 가게 하고는, 나는 혼자 뒤에 처져서는 사방을 둘러보고 왔더니, 시장기가 아주 심하여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서 곳곳에서 앉아 쉬었다.
마침 길가에 집 한 채가 있고, 연기가 많이 피어 올랐다. 그 집을 찾아 들어가 보니, 솥을 걸어 놓고 불을 때는데, 마치 죽을 쑤는 것 같았다.
솥 안의 것을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이 먹는 수제비[水麪] 같았다.
받아 먹어보니, 맛은 의이(薏苡 율무, 식용 또는 약용으로 포아풀과에 속하는 1년초) 같았는데, 곡식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먹어도 쓰지 않았고 배부르고 속이 편안했다. 원 모양을 구해 보니, 과연 풀뿌리인데, 형체가 어린애의 주먹같이 생겼고, 색은 희고 잎은 파랗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풀로, 잎은 파초(芭蕉)잎과 비슷하고, 뿌리는 무와 비슷했으며, 별로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풀의 이름을 물으니, 요로화나(堯老和那)라 했다.
곧 선인을 불러 그 풀뿌리를 보이고, 또 공중철(孔仲哲)을 불러 죽의 맛을 말해 주고, 한 그릇을 얻어서 두 사람에게 먹였더니, 모두 속이 편하고 배부르다고 말하였다. 다른 선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얻어먹고자 했다. 나는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여행용 그릇 일부를 주고, 그 풀뿌리를 가리키어 얻어와서는 죽을 쑤어 많이 먹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다.”
했다. 곧 선인 김한남이 그릇을 가지고 다른 선인들과 함께 일시에 가서 그릇을 주니, 그 무리들은 대단히 좋아하였다. 여러 가지로 가리켜 얻겠다는 시늉을 지어 보이니, 비록 자세히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내가 말한 대로 풀뿌리를 가리키면서 시끄럽게 지껄였기 때문에 헤아려 알아들었다. 선인들을 이끌고 산기슭으로 가는데, 1후(帿)의 거리쯤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함께 따라가 보니, 그 풀이 많이 있었다. 그것을 캐어다가 죽을 쑤어 각기 나누어 먹으니, 다 배부르고 속이 편하였다.
닷새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늘 많이 캐어다가 죽을 쑤어 포식했다. 배의 기구 만들기를 마치자, 생기(生氣)가 다소 돌았다. 한편으로는 풀뿌리를 캐고, 한편으로는 어물(魚物)의 남는 것을 구했다.
이선달이 발견한 "요로화나"의 정체는 오오바유리(オオウバユリ, 大姥百合) 란 식물의
씨앗이었다고 생각된다. 북해도의 아이누 족은 전통적으로 이것을 먹어왔다고 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 이들에게 사냥이나 어업이 시원치 않을 경우에 구황식품으로서 유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언덕 위로 올라가, 두루 다니며 구경을 해보니, 평원(平原)과 광야(廣野)는 옥토(沃土) 아님이 없었고, 흐르는 냇물, 두터운 둑이 다 논으로 만들 수가 있었는데, 한 자[尺]도 갈지 않았다.
(중략)
어떤 곳에 이르니 네 사람이 바다와 하수가 통하는 어구에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물은 7~8발[把]에 지나지 않았는데, 실로 짠 것이 아니라, 나무 껍질의 실[木皮絲]로 짠 것이었다. 잡은 고기는, 송어와 그 외 이름 모를 잡어가 무수했다. 내가 잡아 놓은 물고기를 보고 부러워하며 만지니, 그중에서 한 자[尺]가 넘는 송어 20여 마리를 내 앞에 던지고는 가져가라고 가리켰다.
또 담비 가죽의 옷을 입은 자가 내 앞으로 다가서서 내가 입고 있는 남빛 명주의 저고리를 가리키고, 제가 입고 있는 담비 가죽 옷을 벗어서는, 번갈아 가리키며 지껄이는데, 바꾸어 입자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바꾸고자 하는 것인줄 알고는 즉시 허락하여 옷을 벗어 주고 바꾸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고기를 잡던 원주민은 명주옷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선달은 얼떨결에 물물교환이 성공한다.
5월14일 그리고 그 이후-
떼지어 각기 털옷을 가지고 와 우리 옷과 바꾸자고 하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선인들은 혹은 그릇을 주고 바꾸기도 하였는데 나도 가지고 있던 옷을 다 주고, 담비 갖옷 아홉
가지와 가려서 바꾸었다. 갓끈에 단 수정(水晶) 하나 하나와 바꾸기를 청하기에, 나는 수정
두 알씩을 가지고, 담비 가죽 두석 장과 바꾸었더니, 그 가죽의 수는 60장이나 되었다.
또 허리에 두른 옥(玉)을 가리키면서, 붉은 가죽 일곱 장과 바꾸기를 청하고, 또 여우 가죽
열다섯 장을 가지고는 의복과 바꾸기를 청하기에, 가죽의 품질이 크고 두터워, 북피(北皮
함경북도 지방에서 나는 가죽)의 모양과 같아서 나는 허리에 찬 옥을 끌러 주고, 또 우리
일행이 소지하고 있는 식기와 물에 젖은 면포(綿布) 홑이불 여섯 벌, 보자기 두 장을 다
주고 바꾸었는데, 수달피 석 장을 더 가져왔다. 그 물건은 아주 커서, 한 장으로 털부채를
만들면 네 자루쯤 만들 수가 있다 하였다.
그 이후로 소문이 퍼졌는지 물건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몰려와 버렸다.
겨우 구슬 쥐어주고 가죽 얻으니 개이득.
초창기 유럽인의 북미개척사에 등장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담비 가죽 거래를 연상시킨다.
그곳에 머문 지 닷새가 되자, 그들과 얼굴이 익어, 비록 언어로 뜻을 통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옷과 물건을
바꾼 정분(情分)이 있어 여러 사람이 각기 마른 고기를 안고 와서 정을 표시하였다.
부득이 주는 대로 받으니, 고기가 다섯 섬[石]이 넘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좀 낫다고 보이는 한 사람을
데리고 선두(船頭)로 나가서 배를 가리키고 사방을 향해서 돌아갈 길을 애써 물었더니, 내 면전에 같이
서서 손으로 남쪽을 가리키고 입으로 바람을 내는 모양을 지으면서 ‘마즈마이……’라 말하였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남을 향해 가라는 것인데 실로 갈 길을 몰라, 마음이 답답하고 낙심을 하고 있을
즈음에, 갑자기 북풍이 불어 왔다. 달리 시험해 볼 방도가 없고, 다만 서쪽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서쪽은 무변대해(無邊大海)이고 동쪽으로는 육지여서 동편만의 육지를 따라 남쪽을 향해서 떠났다.
순풍을 만날 것 같으면, 배의 기구가 다 갖추어져서 돛을 가득 달아 빨리 가고 순풍을 만나지 못하고
노를 저어 가다가, 배 댈 곳이면 정박하여 상륙을 했다. 인가를 찾아 들어가 보면 다 역시 그들 무리였다.
하루도 머무름이 없이 장장(長長) 10일을 가, 약 천여 리까지 갔는데도 끝내 그들 무리만이 있었다.
실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방책을 물을 길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적당한 식량까지 챙긴 이선달 일행은 서쪽으로 항해해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왜인과 만날 작정으로 남쪽으로 항해하기로 한다.
여기서 "마즈마이"란 마쓰마에(松前)이란 곳으로 훗카이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이선달 일행이 심각한 길치인 것인지, 순풍이 불지 않아 항해에 애로사항이 꽃피었던 것인지,
장장 17일을 떠돌았는데 마쓰마에는 보일 생각을 않는다.
다시 남쪽을 향해 7일을 갔지만 역시 그 무리들과 같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도한 곳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데리고 배 있는 데로 끌고 가서, 배를 가리키며 전과 같이 물었더니, 또 남쪽을 향해 가리키면서 ‘마즈마이’라고 할 뿐이었다. 여전히 동쪽의 육지를 따라 남쪽을 향해서 육지가 끊어질 때까지 갈 생각으로 갔다.
배가 몹시 고프고 목이 마르면, 혹 하륙(下陸)하여 전에 죽을 쑤어 먹던 풀뿌리를 찾았으나,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어물만 먹어서 치근(齒根)이 솟아 나오고, 아파서 다들 고통을 느꼈다
오랫동안 곡물/채소류를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서 괴혈병 증상을 보이는 이도 생겨난다.
그러던 어느 날.........
계속 남쪽을 향하여 가다가 4일이 되던 날, 해안의 높은 곳에서 갑자기 손을 흔들며 부르는 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모습은 전의 무리들과 아주 같지 않았다. 즉시 돛을 내리고 앞으로 가 보니, 일본인 두 사람이었다. 우리 배의 김백선이라는 자는 일본어를 조금 알아 그들과 말을 통해 보았더니, 간혹 아는 말도 있었고, 비록 피차간 완전히 통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남촌부(南村府)의 왜인들이었고, 금을 캐려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가옥을 크게 짓고, 50여 명의 왜인을 거느리고, 거기서 앞으로 며칠 가야 하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중의 장왜(將倭)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근방에 표류하여 굶주리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그들을 보내어 찾아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백미(白米) 서 말[斗], 잎담배 다섯 뭉치, 장ㆍ소금 등을 전해 주었다. 또 봉한 편지를 전해 주기에 뜯어 보니, 모두 일본 언해(諺解)여서 그 사연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글월의 밑에 다만 한자로 ‘송전인 신곡 십랑병위(松前人新谷十郞兵衞)’라고만 씌어져 있었다. 심중은 다소 기쁘고 마치 꿈을 꾸다가 놀란 듯하였다.
곧 두 왜인과 같이 배를 타고 한편으로는 밥을 짓고 소금과 장으로 국을 끓여, 그릇에 가득가득 담아 나누어 주었더니, 일행은 다 먹고는 곤해서 누워 있었다. 50여 리를 가니, 날이 저물어 포구에 정박했다. 거기에는 인가 일곱 채가 시냇가에 벌여 있었다. 배에서 내려 왜인들과 같이 그 무리들의 집에서 잤다. 나는 조용히 김백선을 시켜서 그 국명(國名)과 지명(地名)을 상세히 묻게 했더니 그가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종이에 붓으로 일본 글자로 써서 묻게 했더니, 국명은 ‘하이(蝦夷)’이고, 지명은 ‘계서우(溪西隅)’라고 했다.
하이는 북해도의 옛 지명이었다. 1869년에 북해도로 개칭된 것.
이들은 마쓰마에번 영주로부터 보내져 일대에서 사금을 채취하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이선달 일행은 드디어 문명 세계의 단초를 찾는다.
이어지는 내용-
다음날 새벽에 출발 했다. 약 70~80리쯤 가니, 해안에 초가가 많이 있었다. 포구에 정박하니, 시내가 계서우(溪西隅)에서와 같이 흐르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들어가니, 30여 칸의 초가에는 각각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의복과 기명(器皿), 기타 집물을 늘어놓은 모양은 부산(釜山)의 관왜(館倭)의 거처와 같았다. 그중의 우두머리 왜인 한 사람이 맞아들여 대좌하고서는, 생선과 술로 대접을 잘하였다. 속으로 기뻐하고 이제는 살 길을 얻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 왜인이 한 장의 글을 써 보이기를,
“나는 마쓰마에 봉행(奉行)의 사람으로 이름을 신곡 십랑병위(新谷十郞兵衞)라 합니다. 모집한 군인을 이끌고 태수의 명을 받아, 여기에 집을 짓고 머물면서 금을 캐고 있은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 3년 만에 한 번씩 마쓰마에 번에 세금으로 황금 50냥을 바칩니다.”
하고, 다시 글을 써서 보이기를,
“처음 정박했던 곳은 어디었습니까?”
하기에, 나는 글로 써서 대답하기를,
“처음 정박했던 곳은, 산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는 듯하고, 바다를 자꾸 건너도 독산(獨山)만이 해중에 솟아 있었는데, 그 끝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곳의 사람은 제모곡(諸毛谷)이라 했습니다.”
하였다.
제모곡이라는 지명을 김백선으로 하여금 직접 발음해서 들려 주었더니,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치하하기를, “하이(蝦夷)의 지경입니다. 여기서 2천여 리나 떨어져 있고, 송전에서는 합계 3천 6백 리나 됩니다. 이 나라는 사방이 다 바다이고, 우리나라의 아주 먼 북방의 지역입니다. 해포(海浦)가 서로 이어져 있고, 땅의 넓이는 어느 곳은 4백여 리가 되고, 어느 곳은 7백여 리가 됩니다. 길이는 3천 7백~3천 8백 리나, 혹 4천여 리도 됩니다. 살고 있는 무리들에게는 원래 다스리는 왕이 없고, 또 태수도 없습니다. 문자를 모르고 농경도 하지 않으며 다만 해산물을 업으로 삼고, 어탕만을 먹어 농사 짓는 이치를 모릅니다. 산에 올라 여우나 곰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서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아무렇게나 짜 옷을 지어 입습니다. 일본에 속해 있으면서도, 공물(貢物)을 바치는 일이 없고, 다만 번에 익힌 전복을 매년 만여 동(同 양의 단위. 조기ㆍ비웃 등은 2천 마리를 1동으로 함)만을 바치고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각 마을마다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 송전 태수의 앞에 나가 배알합니다. 그러나 언어가 같지 않고 금수와 같아서, 일이 있으면 송전은 하이어(蝦夷語) 통사(通事)를 별도로 두어, 그 말을 익히게 하며, 매년 한 번씩 마쓰마에에서 시자(侍者)를 보내어 그들의 나쁜 바가 있는가를 살피어 다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또 그들은 마을 안에 나이가 많은 자를 그 수장으로 정해서는 마을 안에 나쁜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잡아내어, 그들끼리 그의 죄악의 경중을 논해서 손바닥 모양으로 만든 쇠매[鐵鞭]로 등을 서너 번 때리고 그치고, 더욱 죄악이 중한 자면 다섯 번을 때리고 그칩니다. 그 밖에 아주 심한 자면, 태수의 앞으로 잡아다 놓고 죄를 논하여 알리고 참수케 합니다.
그 무리들의 성질은 본래 억세고 포악하여, 신이나 버선을 신지 않은 채 산곡이나 우거진 숲속을 돌아다닐 수가 있으며, 가시덩굴을 밟고 넘어 높은 언덕 위에서 여우나 곰을 달려가 쏘아 잡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서 바다에서 큰 고래를 찔러 잡고, 눈과 추위를 참아 습한 땅 위에서 자도 병에 걸리지 않으니, 실로 금수와 다름이 없는 자들입니다.
옛날 남방 사람의 상선이 그곳에 표류되었는데, 이 무리들은 선인들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였다가, 그 일이 발각되어, 송전에서는 그 작당했던 무리들을 적발해서 부모ㆍ처자ㆍ족당들을 불에 태워 죽였는데, 근래에는 사람 죽이는 짓은 없어진 듯합니다. 그래도 이번에 그곳으로 표류했다가 빠져 나올 수가 있었으니, 복 받은 분이라 할 만합니다. 또 들으니, 당신께서 처음 정박했던 곳의 외방(外方)에 별도로 갈악도(羯惡島)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땅인지 모르지만, 그곳의 사람은 키가 8~9척(尺)이나 되고, 얼굴ㆍ눈ㆍ입ㆍ코가 모두 하이족(族)과 같고, 모발은 길지 않고 그 색깔은 다 붉으며, 창으로 찌르기를 잘 합니다. 혹간 하이족(族)이나 일본인이 그곳으로 표류를 하면, 다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고 가끔 살아 도망쳐 온 자들이 전해 줍니다. 만일 며칠만 더 표류했더라면, 더욱 무섭고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면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이어서, 그대는 꼭 장수(長壽)할 분입니다.” 하였다.
우리는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술과 밥을 후하게 먹여 주었다.
파견되어 사금 채취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만나 일대의 자세한 사정을 전해 듣는다.
이들은 7월 경에 마쓰마에 번의 태수에게 보내졌고, 거기서도 후한 대접을 받는다.
여기서 태수는 이 사건을 관백에게 보고하고, 관백은 그를 잘 대접해 본국에 보내주라고
명령했던 모양이다. 이 선달이 "난 내 나라에서도 가마 탈 처지가 못 되는데....: 라며 극구
거부하지만 가마까지 태워다 배웅해 주고, 오사카 등지를 거쳐 대마도에 당도하고,
여기서 배를 기다려 이듬해 3월이 되어서 부산포를 통해 귀국한다.
표류한 날부터 귀국까지 장장 1년이나 걸린 셈이었다.
고전 번역원 :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