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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순수 이성 비판

과정 2017. 5. 23. 06:11


칸트는 1724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어.

그의 집안은 기독교 가정 이었는데, 13세 모친 22세에 부친을 여의고 자립하게 되었지.

그리고는 46세에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논리학과 형이상학 담당교수가 되었어.

 

 

칸트는 엄청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고, 자기가 살던 지역 밖으로 나가는 걸 꺼려했어.

그래서인지 다른사람들이 칸트를 보면서 시간을 알았다는 일화도 있어.(그만큼 규칙적인 생활을 했단 거지)

이러한 칸트가 1781년에 쓴 책 <순수이성비판>에 대하여 지금부터 알아볼게.

 

 

 

우선 알아보기전에,  철학자들의 책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자들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을 비판하거나 아예 새롭게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어서 관련 철학의 사조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고

 

또한 각각의 철학자들이 쓴 책 속에서의 용어 정의가 매우 중요해

 

그래서 나는 이러한 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쓸테니까 안심하고 읽어줘.

 

  

 

Q 1. 인식주관이 어떻게 인식객관(=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객관적 사물 자체(=물자체=존재)"가 아닌 그 사물에 대한 "주관적 표상(=인식)"일 뿐이야.

이게 도대체 무슨소리냐고?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 인간은 수정체에 들어온 빛이 망막을 지나 빛을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대뇌로 전해져  '인식' 이라는 것을 할 수 있잖아?

하지만 박쥐는 초음파를 쏴서 그것이 반사되면 박쥐의 인식형식에 따라 인간처럼 수용해서 나름 대로 '인식' 하게 될 거야.

 

그렇다는 것은 '인식주관'의 '인식형식'에 따라서  인식객관이 달리 보여지게 되는 것이야.

인식주관의 인식형식에 따라서 보여지게 되어서 한정된 인식객관이 아니라

 그 사물의 자체, 즉 '물자체' 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용어 정의를 하고 갈 거야.

인식 주관의 인식 형식에 따라서 "제한된" 사물 자체(=물자체)를  '표상'이라고 말할 거야.

인식 주관의 인식 형식에 따라 제한된 것이 아닌, 객관 사물 자체를 '물자체(=존재)'라고 말할 거야.

 

 

 

따라서 이로인해 진리의 패러다임(=사고방식의 틀)이 바뀌엇다고 할 수 있어.

무슨 말이냐고?

칸트 이전에는  알고자 하는 진리의 일치의 기준이 객관 사물(=존재)와 인식 객관(=세계)와의 일치가 기준이었다면

칸트 이후에는 인식(=표상)과 인식 주관의 일치로 바뀌어서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거야.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식의 참 거짓은 내가 인식한 주관적 표상이 내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사물과

일치하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야.

 

따라서 진리는 '표상과 대상의 일치' 로 간주되는 것이야.

(앞서 말했지만  표상은 인식 영역에, 대상은 존재 영역에 속하는 것)

 

 

 

만일 인식과 존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표상 너머의 사물 존재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다는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보편타당한 객관적 인식, 절대적으로 참인 인식은 불가능하게 된다...

 

 

 

만약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알아본다' 라는 원리를 전제해본다면

그 근저에는 경험적 현상차원을 넘어서서

"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엮는 초경험적인 초월적 차원의 동일성"을 논하게 된다.

주관에 의해 제약된 현상차원이 형이하의 세계라면 "주관과 객관" 그 둘을 하나로 연결 짓는

초월적 차원은 형이상의 세계인 것이야.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란 인식과 존재의 분리가 성립하는 현상세계에 대해 그 둘을 매개하는

근원적 동일성을 찾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

 

 

 

 

Q2. 주관과 객관을 매개하는 근원적 동일성은 무엇인가?

 

 

2-1. 플라톤의 대답

 

플라톤에서 주객을 매개하는 동일적 근원은 "선의 이데아"였어

이데아가 무엇이냐면 절대 변하지 않는 세계가 따로 있는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 세계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세계가 이데아야.

우리가 알아보고자 하는 건 칸트 철학이기 때문에 자세히 알지 않아도 괜찮아.

 

 

 

2-2 중세 스콜라철학의 대답

 

신이 자연세계를 일정한 창조이념에 따라 창조했는데

창조이념 자체는 그에 따라 창조될 물질적 자연과는 달리 이념적인 것이며, 인간의 정신 역시

이념적인 것이기에, 인간의 정신은 창조이념을 이해하고 세계는 바로 그 이념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결국 인간은 세계의 존재와 질서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어.

 

 

 

2-3 근세 데카르트의 대답

 

근세 데카르트는 ' 나는 사유하는 한, 존재한다 '라는 제 1명제를 통해 신을 증명하고

이 절대적 존재의 신의 성실성이 내가 세계에 대해 갖는 인식의 진리성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했어..

즉 신이 나의 이성과 상상력을 거짓기관으로 창조하지 않는 한, 세계에 대한 이성적 앎이나

경험적 앎이 실제로 있지도 않은 세계에 대한 거짓된 앎일수 없다고 생각했어.

 

 

 

2-4 근대 합리론자와 경험론자들

 

 

합리론자들이 세계에 대한 이성적 앎, 수학적 앎의 절대성과 보편타당성의 근거로 제시한 '본유관념' 은

스콜라철학에서 논의된 신의 창조이념에 해당되.

즉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본유관념에 따라 세계를 창조 했고, 만약 세계가 본유관념과는 다른 질서로

존재한다면 신이 우리를 기만했다는 말이 되므로 "성실한 신이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경험론자들은 수학이나 물리학을 신적 본유관념에 기반한 절대적 확실성의 인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단지 '독단'일 뿐이라고 주장해.

왜냐하면 백치들은 그런 관념이 없기 때문이지

따라서 ' 모든 관념이나 인식은 세계와의 접촉과 경험을 통해 비로소 얻어질 뿐이다'라고 주장해.

 

그러나 개별사례로 얻어진 귀납적 일반명제는 개연적 확실성만을 가질 뿐 절대적 확실성을 갖지 못해.

 

 


" 합리주의적 독단론도 아니고, 경험주의적 회의론도 아닌 제3의길은 없겟는가? "






Q3. 칸트적 대답의 길

 

 

합리주의적 독단론과 경험주의적 회의론을 피해 제 3의 길을 개척해 나간 것이 칸트의 대답이며

이러한 칸트의 철학을 '비판철학'이라고 한다.

칸트는 제 3의 길에 대한 대답으로 '선험적 종합판단' 이라는 것을 내세웠어

지금부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게.

 

 

 

 

3-1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이것에 대답하기 위해서 판단의 종류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어.

 

 

분석판단(=서술판단)은 술어가 주어개념을 분석하여 얻어지는 판단이야

-> Ex: 총각은 결혼 안 한 남자이다.

 

종합판단(=확장판단) 주어 개념의 분석을 넘어서서 새로운 정보가 더해진 종합 판단이다.

-> Ex: 저 책상은 노랗다

 

경험판단은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으로 보편타당성을 얻을 수 없는 판단이야.

선험판단은 판단의 근원이 경험에 있지 않은 선험적 판단이야.

 

 

 

칸트 이전에 선험판단은 단지 분석판단, 종합판단은 경험판단으로 간주되었는데

선험적 분석판단을 주장한건 합리론자들이고 경험적 종합판단을 주장한 건 경험론자였어.

하지만 칸트의 비판철학은 이와는 다른 제3의 길로서 ' 선험적 종합판단 '을 주장한다고 말했엇지?

 

 

 

칸트 비판철학에서의 핵심은 선험적 종합판단의 기원을 합리론자의 '본유관념'이나 경험론자의 '경험'이 아닌

"인간 자신"으로 부터 구하는 데에 핵심이 놓여있어.

즉 '주관의 인식형식이 인식된 대상세계의 존재형식' 이 된다는 말이야.

 

 

 

앞서 살펴보았던 데카르트, 플라톤등과 달리, 인식 주체와 객체 간의 동일적 근원은 '인간 자신'이 되는 것이야.

선험적 종합판단의 근거를 인간 바깥의 다른 것에서 구하지 않고 인간 자신 안에서 구한다는 점에서

칸트는 자신의 초월철학적 시도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른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처럼 칸트 자신이 혁명적인 전회를 시도했단 의미야.)

 

 

 

주관의 인식형식이 인식된 대상세계의 존재형식이라면

인식형식이 같은 인간들끼리는 인간마다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인식형식의 '상호주관적 보편성'이 있다는 걸 의미해.

그리고 인식형식 자체는 선험적인 것이지.

(왜냐하면 뇌가 경험적일 수는 없잖아.?)

 

 

 

우리는 여기서 '인식'이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용어정리를 하고 갈 거야.

 

인식은 크게 ' 직관 ' 과 ' 사유(=오성) '으로 나눠 볼 수 있어.

 

칸트는 인식 작용을 ' 직관 ' 이라고 하고, 직관을 행하는 인식능력을 ' 감성 ' 이라고 햇어

(직관에는 내적직관과 외적직관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술 하고

이제 위 정의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덧 붙여 볼게.)

 

 

 

내 눈 또는 내 머리에 떠오른 초록색 영상만으로 나뭇잎을 직관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직관은 감각자료를 직관의 내용으로 갖지만, 그 직관내용을 내 밖의 어떤 것과 연결짓는 일정한 형식

즉 직관의 형식을 필요로 하게 돼.

그리고 직관의 내용과 형식은 그렇게 직관된 것이 바로 현상이기에 곧 현상의 내용과 형식이 돼.

 

 

 

직관의 '외적 형식' 은 나와 나무를 벌려놓은 ' 공간 ' 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때는 외부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를 보다가 문득

내적으로 시선을 돌려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내적인 나를 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 내적 직관'이다

 

그렇다면 직관 내용을 내게 소속시키는 ' 내적직관의 형식 '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나를 보는 것은, 현재 순간의 나를 내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 이전의 나를 직관한다. 

 

 

 

" 외적 대상이 눈에 달라붙어 있으면 바라볼 수 없고 공간적 거리 속에서만 직관이 가능하듯이,

내적 직관 대상인 나 자신을 직관하기 위해서도 시간적 거리가 취해져야 하는 것이다. "

 

 

 

나아가 외적직관도 내적직관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거리를 취해야만 의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은 '내적, 외적 직관 모두의 형식' 이다

즉 시간은 ' 직관 일반의 형식' 이다.

 

 

직관 된 현상의 내용은 경험적이지만, 그 내용을 정리하는 직관의 형식인 시공간은 선험적인 것이지.( 뇌와 마찬가지)

현상 사물들 외적현상인 한 시공간의 형식에 따라 정리되고

내적현상인 한 시간의 형식에 따라 정리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직관에서의 개별적 표상을 넘어서서 일반적 표상으로서의 '개념'을 형성하고 그 개념에 따라

주어진 사태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오성(verstand) ' 이라 한다.

 

 

초록색 종이나 나뭇잎을 보며 상이한 특성들은 배제시키고 공통적인 특성을 추출하여

초록색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형성된 개념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직관표상에 적용하여

판단을 내리는 정신적 능력이 오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야.

 

 

 

판단도 개념의 내용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닌 '판단의 형식'이 필요하게 돼.

일반적으로 판단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논리학일텐데

 

 

 

- 형식 논리학에서의 기본 판단 형식

: 전칭긍정판단, 전칭부정판단, 특칭긍정판단, 특칭부정판단

(위 4개의 판단은 양과 질에 따른 판단이다.)

 

 

 

칸트는 기존의 형식 논리학에서의 기본 판단 형식에서의 양과 질에 따른 판단 유형을 더 세분화 하여 논했어.

양에서는 전칭판단과 특칭판단 이외에 단칭판단을 구분하고

질에서는 긍정판단과 부정판단 이외에 무한판단을 구분한 것이 그것이야.

(다른 판단 구분도 존재하지만 생략할게.)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면 대충 이렇고, 칸트의 논리학을 일반논리학과 구분되는 초월논리학이라고

생각해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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