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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조선의 소현세자

과정 2017. 5. 27. 17:25


그는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였다.


이름은 이왕이었다.



이후 그는 소현세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불리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조선의 새로운 임금이 됐다.


그 후 2년이 지나 

그는 세자 책봉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두 해가 지났을 무렵,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패잔병들이

후금(이후 청나라)에게 달려가서 후금을 부추겼다.


후금과 친분을 다지고자 했던 광해군을

인조가 부당한 방법으로 몰아냈으니,

이를 헤아려 복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명을 정복하기 전에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청에게도 달가운 소리였다.



후금은 병사를 몰아 조선으로 내려갔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조선은 많은 군사를 잃었고,


일평생을 말 위에서 살아온 자들로 이루어진

후금의 기마병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없었다.



왕족과 재상들은 서둘러 강화도로 피신했다.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 백성을 다독이고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장수들과 의병장들에게 상을 내리는 등


전란 수습을 위해 힘껏 분조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 해 재상을 지냈던 강석기의 딸, 


강빈을 만나 혼인하였다.



한 번의 전쟁을 겪기는 하였지만

평범한 세자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청은 기마병의 강점을 살려 빠르게 치고 내려왔다.


조선이 저항을 해볼 틈도 없이,

그들은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내달렸다.



청나라의 너무 빠른 진격속도에 

강화도로 피신을 가기 어려워지자,


인조와 소현세자, 재상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하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남한산성의 찬바람은 계속이 거세지고,

식량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희망이 없는 상황속에서

전의를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45일간의 농성이 조선의 항복과 함께 끝이났다.


인조는 죄인이 되어, 

왕의 옷을 벗고 푸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청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세번 절을 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다.

(삼배구고두례)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 태종은 명나라를 공격하는 과정에

조선이 배신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보증받고자


세자를 데려가기를 원했다.



지금 볼모로 잡혀간다면,

살아서 못돌아올 수도 있는 길.


더군다나 그는 왕의 후계자인 세자였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자신을 청에 보내달라고 자청했다.


' 제가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제겐 형이 있고, 아우가 있으니


그 누구라도 후사를 이어갈 수 있다면

그 것으로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


그는 조선과 왕이자 아버지인 인조, 나머지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자 했다.



세자가 청의 수도 심양으로 떠나던 날,

조정대신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조는 청의 장수에게 

세자가 추위를 많이 타니, 

꼭 온돌방에 재워주기를 당부했다.


국가의 존속이란 명분하에,

인조와 소현세자는 부자의 이별을 맞이했다.



춥디추운 북쪽 길을 지나가는 사이,


인조의 당부와 달리

소현세자는 때로는 들판에서, 때로는 시냇가에서

혹은 천막을 친 곳에서 잠을 자며 행렬을 이어가야 했다.



청은 조선의 백성을 노예로 팔고자,

이들을 함께 데려갔다.


그 때문에 추운 길을 빨리 지나갈 수도 없었다.



이후 심양에 당도하기전,

청은 소현세자에게 가마에서 내리라 말하였다.


황제가 계신 곳에 감히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없다는게 그들의 이유였다.



소현세자는 가마에서 내려 말로 옮겨탄 후,

심양에 입성하였다.


패전국의 세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후 세자는 심양관에 머물렀다.


이 곳에서 그는 자신과 함께 온 신하들과 학문에 관해

토론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임무를 수행하였다.



청 황제는 사냥을 나갈때면 소현세자를 불러 함께 다녔다.


소현세자는 말을 타는 일에 능숙하지 못하였다.

그 덕분에 하루에 25 km에서 30km 가까이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는 그들과의 시간은 소현세자에게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몇번이고 낙마하여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청은 조선에 요구할 것들을 말해주고

이를 소현세자에게 전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조선과 청 사이에서 

오늘날 외교관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패전국의 세자였을뿐

왕이 아니었다. 그에겐 결정권이 없었다.


단 한푼이라도 덜주려고 하는 조선과

끊임없이 협조와 무언가를 요구하는 청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그는 점점 심적으로 지쳐갔다.



청의 용골대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파병을 요구하며 소현세자를 끊임없이 겁박했다.



소현세자는 불같이 화를 내며 용골대에게 말했다.


' 내가 비록 이역에 와있으나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일은 천명에 달려있는 것이니,

다시는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 '

(1640년 11월 인조실록)


이 말을 들은 용골대는 그의 담대함에 놀라

한 걸음 물러나며 소현세자에게 사과했다.


이후 용골대는 소현세자를 높이 사 그를 각별히 아끼고

터울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이 후 청나라 심양은 극심한 흉년에 시달렸다.

그로인해 소현세자에게 식량을 대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곳간이 말라가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에 이를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현세자는 심양관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당시 심양관에 머물러있던 500명의

사람들을 모두 먹일만큼의 곡식량의

3배에 달하는 양을 수확했다.



소현세자의 아내였던 강빈도 함께 일을 도우며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자에게 힘을 보태고자 노력했다.



강빈은 이 후 청나라와 무역을 통하여

심양관에 살림을 꾸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 이를 통해 모은 재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와의 뇌물 외교에

돈을 보태어 심양에서 조선을 돕고자 노력하였다.



소현세자 역시도 분주히 움직였다.


심양관이 조선과 청나라를 잇는 대사관 역할을 하고있는 상황속에서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자

청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쌓기위해 노력했다.



당시 심양에는 조선에서 끌려온 백성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이 있었다.


이들은 피로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핍박받는 조선의 백성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들을 구해주고자 노력했다.



그는 심양관에서 모은 재물을 이용하여

노예상인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조선인들을 구해냈다.



덕분에 피로인들은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날 수 있었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중 몇몇 사람은 소현세자를 돕기를 원하여

심양관에 남아 농사를 도왔다.


' 재물을 늘려 잡혀간 우리나라의 남녀를

상환한 것이 수백인에 달했다 '

(인조실록)



' 포로로 잡혀간 조선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하여 곡식을 쌓아놓고는


그 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교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같았다. '


(1645년 6월 27일 인조실록)



사농공상의 나라, 조선.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천한 일로 여겼던

몇몇 신하와 사대부, 그리고 인조는


왕족인 세자가 무역을 통해 재물을 쌓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굉장히 아니꼽게 여겼다.



무역활동을 통해 재력을 쌓아, 이를 이용해 청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쌓고 정치력, 외교력을 발휘하여 조선을 돕고자 했던


소현세자의 마음을 조선의 중신들과 인조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청은 소현세자의 이러한 수완을 높이샀다.

그덕에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의 평판은 긍정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조선의 국왕과 상의했을 일을,

청나라는 대부분 소현세자와 먼저 말문을 텄다.



광해군이 명을 멀리하고 후금(청나라)를 가까이 한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인조.


인조 정권의 정통성은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순간부터

산산조각 나버렸다.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에도 광해군은 유배지에 살아있었고,


신하들은 ' 광해군이 이를 보고 비웃을까 무섭다 ' 라며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인조는 왕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다.


마침 청나라가 나랏일을 세자와 먼저 상의하니,

세자가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한다고 의심했다.


소현세자를 향한 인조의 미움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편 소현세자는 오로지 조선의 국익만을 위해

청과 조선의 외교 최전선에서 온 힘을 다해 일했다.



이 후 청나라는 명의 수도인 북경을 함락시켰다.


한때 중원을 지배하며 천하를 호령하던 명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세상과 문물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전 70일 동안 베이징에 머물렀다.

그 곳에서 중원의 문물을 보고 배웠다.



그리고 독일 출신의 선교사인 아담샬을 만났다.


아담샬과 소현세자는 서로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아담샬은 소현세자에게 서양의 문물을 알려주고

자신의 식견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소현세자는 서양문물에 대해 깊이 매료되었다.


이후 소현세자가 떠날때,

아담샬은 그에게 서양의 천문학이 기록된 책과

지구의, 천주상을 선물로 주었다.


소현세자는 이 책들을 조선에서 간행하겠노라고

아담샬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8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을때,


권력에 눈이 먼 인조는 소현세자를 문전박대했으며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벼루샷은 야사, 즉 정식기록이 아님)



이 후 귀국한지 2달만에 소현세자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병이 발견된지 4일만에 죽은 것이었다.


그 때 그의 나이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당시 왕족이었던 이세완이 소현세자의 시신을 보고 증언하길


' 학질이 아닌 약물 중독으로 죽은 모습이었다. 

세자의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얼굴 반을 덮어 놓은 상태였다.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얼굴빛이 검어도 

주위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



모든게 의문 투성이의 죽음이었지만, 결국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인조가 세자의 죽음을 밝히는데 무관심하였고,


심지어 세자를 치료한 의관을

' 신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 라고 두둔하기 까지 했다.



이 후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하지만 원래 세자가 죽으면,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물려받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신하들이 크게 반대하였지만,

인조는 끝까지 봉림대군을 세자에 앉혔다.



소현세자 사후, 

그의 아내이자 세자빈이었던 강빈의 친인척들은


인조가 ' 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삼지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을 것이다 '

라는 이유로 유배를 보냈다.



대소신려들은 아무런 명분도, 죄도 없는 사람들을

유배를 보낼 수 없다고 인조를 뜯어 말렸으나

인조는 이미 왕의 자리를 지키는데에만 혈안이 돼있었다.



이 후 강빈은 인조의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는

누명을 쓰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소현세자의 세 자식 중 두명은 유배를 가는 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소현세자의 일족이 멸족 당한 것이다.



이후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뜻을 

거슬러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


즉 강빈이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녀의 성격이 변변치 못하였던 때문이라는 것과


강빈의 죄목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는 것 이었다.




그 외 잡다한 이야기들


1. 심지어 소현세자를 치료했던 의관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원래 의관도 아니었고 3개월전쯤부터 추천받아서 들어온 의관임.


2. 독설에 휘말린 많은 왕이 있었지만, 왕조실록에 독설에 대한 의혹이 

써진건 소현세자가 처음. 그만큼 의혹이 많았다는 뜻.


3. 인조는 이후 소현세자의 장례를 개판으로 치뤘음. 상복도 1개월만에 벗었고,

신하들이 ' 저희들은 세자에 대한 예를 다하고자 상복을 1년 입고자 하니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 ' 라고 간곡히 청했지만, 인조는 '좆까 씨발년들아 '

하고 다 벗으라 했음.


4. 벼루샷의 내용은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고 돌아온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돌아올때 청나라 황제가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으니까


소현세자는 황제가 쓰는 벼루를 달라고 했고, 봉림대군은 물건 대신 조선의 백성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함.


그래서 벼루 들고가니까 인조가 그 벼루를 소현세자한테 던졌다는 이야기임.

아마도 봉림대군이 진정한 왕재라는 명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생긴 이야기가 아닐까 싶음.


5. 원래 세자가 죽었을때, 세자에게 친아들이 있으면 그 아들에게 세자를 물려줘서

세손이 되는게 맞음. 영조도 사도세자가 죽었지만, 세자 자리를 정조에게 물려줘서

정조가 세손이 되었던 것처럼.


원칙에 죽고못사는 조선에서 대소신려들이 반대했음에도, 인조가 이를 밀어부쳤다는거

자체가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증거 중에 하나로 인식되고 있음.


[출처] http://www.ilbe.com/5221155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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