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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톨스토이와 소피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부활’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대문호!
책은 안읽어봤어도 최소한 제목 정도를 알고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며, 마누라 소피아는 3대 악처로도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씨발 얼마나 마누라가 좆같았으면 여든둘 노구를 이끌고 가출해서 객사했을까 할텐데
소피아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보빨새끼 ㅁㅈㅎ! 하지말고 일단 좀 들어보자
<톨스토이와 소피아, 톨스토이가 죽기 두달전 사진>
작품만 보면 톨스토이는 천재라고 할수있을텐데 젊은 시절 톨스토이는 개였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하녀들 따먹고 다니며 도박과 보지에 환장했었다.
(톨스토이가 여자에 집착했던 것은 바로 두 살때 애미리스하는 바람에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게이들이 부러워할만한 20대를 흘려보낸 톨스토이는 30대가 되자 슬슬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는데...
“야 남자는 결혼을 해야 사람이 되는거야. 난 탈김치 마누라 만나서 너무행복하다. 너도 얼릉 장가가라”
궁정 의사였던 친구새끼가 자꾸 지만 20만원 용돈타쓰는게 억울했었는지 톨스토이를 결혼하라고 바람넣었다. 그러던중에..
“호옹? 쟤 누구냐? 주멍이다 개꼴 씨발 저런애라면 결혼해봐도 괜찮을거같은데?”
“......”
톨스토이를 꼬서하게 만든 주인공은 그 친구의 딸이었다.
친구는 처음에 나이차때문에 반대했지만 톨스토이의 끈질긴 구혼으로 7일만에
18살 초경 선지도 안마른 딸을 서른넷 아재에게 넘겨주게 되는데 이때가 1862년 9월 23일이었다.
서른넷의 톨스토이와 아직 젖탱이 몽우리가 말랑한 아다 18세의 소피아...
아...씨발 존나 배 아프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당시 아들도 하나 있었다.
물론 법적 혼인으로 얻은 아들이 아니고 자기 메이드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였지만 톨스토이의 아들이었다. (누군가 떠오르지만 쉿!)
16살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톨스토이는 쀼사이에 비밀이 없어야 한다며 서로에게 일기장을 보여주자고 제안하고
신부에게 자신의 15년치 일기장을 건넨다. 씨발 아재새끼가 어디서 본건있어서 되도않은 교환일기질이여...
물론 취지는 훌륭했다. 이 일기장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바람직한 부부상을 꿈꾸자했었는데 오래가진 못했다.
왜냐? 안마오피간거까지 적을수는 없으니 아내가 보는 일기와 자신만의 비밀일기 두 개의 일기를 쓴게된다.
뭐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어린 신부는 그렇게 교환일기를 하게되는데 일기장에는 젊은 시절 여자와 도박에 빠져 살던 톨스토이의 행적이 쭈욱 적혀있었다.
서른넷의 톨스토이에게 지나간 추억 정도로 치부할수있겠지만 열여덟 때 묻지않은 소녀에게는 그 일기장은 소라넷 후기 그자체였다.
(공개용으로 쓴건데도 어떻길래ㅋㅋ)
결국 톨스토이의 일기장은 어린신부에게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켰다.
톨스토이는 마누라 생리대값이 아까웠는지 어린마누라라 맨날 섰는지 쉴새없이 74를 해서 무려 열세명의 아이들을 낳게되었다.
뭐 부부 금술이 좋아 애를 많이 낳았다는데 누가 뭐라겠나. 게다가 둘다 ㅅㅌㅊ집안이어서 돈걱정도 안해도 되는데...
근데 문제는 톨스토이가 모성애에 대한 집착이 강해 유모를 들이지않겠다는 완강한 고집이었다.
당시 귀족들이나 나름 먹고살만한 집에서는 유모를 부르는게 상식이었는데 배꺼질날 없고 젖마를날없는 소피아는 슬슬 야마가 돌기 시작한다.
게다가 원래 허약하게 태어난건지는 모르나 열세명 자식중에 여섯은 어려서 죽게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톨스토이는 끊임없이 소피아에게 74를 했고 유모는 반대했다.
여기까지였으면 소피아도 그냥저냥 버티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돈은 많겠다. 시간도 많겠다. 애들 키우는낙으로라도 산다면야... 그러나
“헤이~ 여보달링자기마누라 이거 내가 이번에 쓴작품이야”
“전쟁과 평화... 엄청 두껍네... 근데 설마....”
“응... 자기가 교정좀 봐줘^^”
“........”
천재는 악필이라고 했던가? 대문호 톨스토이의 원고는 사람이 읽을수없을 정도의 악필이었다.
이 악필을 사람이 볼수있게 교정하는일은 언제나 소피아의 일이었다.
육아와 교정 작업까지 떠맡은 소피아... 그래도 나름 내조하며 현모양처로 살아갈려고도 애썼다.
남편의 성격이 모난건 시애미가 일찍 세상떴기때문이고 글씨는 못써도 글은 잘쓰니까...
유모 못쓰게하는건 모정에 굶주렸던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이해할수도 있지... 라고 마인드 컨트롤이라도 하지않았을까..
근데 드디어 야마뚜껑 터지고 역삼일한하게 될일이 생긴다.
“사유재산을 가진다는게 말이되나? 우리는 지금 농민들을 착취하는거야 난 재산을 모두 환원하겠어!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농부가 되는거야 날 따르라 소피아!”
“................ 이 씨1발새끼가 진짜.......”
그후 허벌라게 치욕받고 쫓겨난 톨스토이는 모텔가서 인증하다 객사한다.
지주생활을 청산하고,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었겠지만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온 소피아에겐 좆깨무는 소리가 아닐수없다.
그동안 악처라고 불곰년 AUT! 했었지만 소피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톨스토이도 결코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2. 마리 퀴리
마리퀴리(Marie Curie)하면 나같은 국딩시절 새끼들은 퀴리 부인으로 위인전 한번쯤은 읽어봤을거고
인류역사상 퀴리부인 빼고는 득된년이 하나도 없다고 할정도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고
프랑스 저명인사들만 묻힌다는 판테온에 안장되었으며(롤충새끼들 호잇!)
유로화 쓰기전 프랑스 제일 고액권 5백 프랑화에 초상이 인쇄되었던.. (ㅎㄷㄷ하구만..) 여성중에 가장 인류에 공헌한 사람이라고 할수있겠다.
지금은 마리 퀴리로만 나오던데 그만큼 강해진 보지파워에 실감한다.
그 위인전 뒷부분에는 안나오던 불륜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상황까지 가던 마리 퀴리를 알아보자.
<피에르 퀴리와 마리퀴리>
마리와 피에르, 폴란드계 유태인이며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성 물리학 박사였던 마리는 여덟살 많은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 3년후 어느날 라듐을 발견하는데...
라듐의 발견으로 피에르는 노벨물리학상의 후보로 추천! 근데 이 첫 번째 노벨상 수상에서 마리는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씨발 이런게 어딨노! 울 마누라가 을매나 열심히 연구했는데! 울마누라 이름 안넣어주면 나 노벨상 안받음ㄴㄴ”
피에르는 마리의 공동수상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러한 보빨덕분에 1903년 노벨물리학상은 피에르 퀴리, 마리퀴리, 앙리 베크렐 세사람이 공동 수상하게된다.
부부는 행복했고 두딸은 잘자라주었으며, 연구는 인정받았다. 얼마나 좋을까 씨발..
근데 불륜의 주인공 피에르의 제자 폴 랑주뱅이 나온다.
폴은 유능한 제자였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연구에 있어서는 특출난 성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이론을 깔끔하게 정리잘하는 밑에 두고 호구로 부려먹기 좋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폴과 마리는 남편제자와 사모님 관계일 뿐이었는데...
1906년 5월 7일, 복잡한 길을 지나던 피에르는 짐마차 바퀴에 머가리가 깔려 두부외상값도 못갚고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피에르의 나이 마흔일곱, 마리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11년간 부부이자, 동료이며 친구였던 피에르와 마리였기에 피에르의 갑작스런 죽음에 마리는 오열하며 힘든 나날을 보낸다.
실연후의 보지만큼 쉬운 여자는 없다고 (나는 모르겠더라...씨발...)
마리를 위로해주던 폴에게 마리는 상실감을 달래려 하다 그만 눈이 맞게된다.
이둘은 사랑하게 되지만, 문제는 이둘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용납될수없는 사랑이란 것이다.
스승의 여자라서? 남편의 제자라서? 그게 아니라 문제는 폴이 유부남이었다.
연구밖에 모르고 피에르와 진실로 사랑했던 탈김치 마리도 늦바람이 불어 적극적으로 불륜을 즐기며 아파트까지 구해 밀회를 한다.
그러다 폴의 마누라한테 걸렸다. 쩝..
<제 1회 솔베이회의, 앉아서 턱괴고있는 여자가 마리퀴리, 사진 맨 오른쪽이 폴 랑주뱅이다. 그옆은 아인슈타인 ㅋㅋ>
이런 상황에서 1911년 마리는 노벨화학상 수상 결정이 났는데...
폴의 마누라가 마리가 폴에게 쓴편지와 남편새끼가 노벨상받은년이랑 바람난 썰.ssul을 일간지 뢰브르에 보내어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당연히 신문에 대서특필되면 프랑스는 뒤집어졌다.
“유태인 갈보년이 착실한 프랑스유부남을 꼬셨다!”
“가정파괴범 퀴리!”
이쯤되자 폴은 먹튀하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졸지에 언론의 까발림당하고 남자에겐 버림받은 마리...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도 마리에 대한 노벨상을 다시생각하게 된다.
“아 씨발...상을 주자니 그렇고 안주자니 또 그렇고...”
“근데 준다했다 뺏을수도 없잖아 불륜이랑 과학이랑 무 슨상 관이야”
어쨌든 마리는 1903년에 이어 1911년에 다시한번 노벨상을 받는다.
하지만 국가의 명예이건만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녀가 노벨상의 권위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했으니...
본문과는 상관없으나 퀴리집안에서 노벨상은 또있다.
큰딸 이렌느와 사위가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아서 2대에 걸쳐 부부가 노벨상을 받았고
그리고 자기 어머니 퀴리부인이라는 전기를 쓴 둘째딸 이브퀴리는 2차세계대전당시 전쟁특파원으로 활약하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 사무총장 특별 보좌관을 했으며 그의 남편은 유니세프 대표로 노벨평화상까지 타니 노벨상 4개나 받은 ㅆㅅㅌㅊ집안이다.
<이브 퀴리>
사실인지 구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브 퀴리는 이런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우리집안의 수치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남편 모두 노벨상을 받았는데 저만 못받았거든요.”
북대서양 조약기구 사무총장 보좌관한 사람이 정말 저런말했으면 일게이들 다죽으라는건데 아무튼 재밌네..하하... 재밌어...
3.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존나 유명한 말을 학창시절 윤리시간에 한번쯤 다 외워봤을거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와중에서 신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관의 무게중심을 옮긴 위대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사실 이 위대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늦잠 처자길 좋아하는 잠마왕이었다.
<데카르트>
17세기 초반, 프랑스의 소도시 부유한 귀족부모 밑에서 은수저는 물고 태어나
어릴적부터 똑똑대학교 누구십니과에 입학할 정도로 싹수가 보이기 시작한 데카르트를 부모는 기숙학원에 보내서 ㅅㅌㅊ로 만들고 싶어 했다.
여덟살이 된 데카르트는 라플레쉬에 있는 예수회 학교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일생의 습관이 되는 늦잠 명상을 체득하게 되는데...
“자~ 착한 어린이들은 일찍 일어나야해요. 일찍일어나서 이부자리 정리하고 하루를 어서 시작합시다~”
“선생님!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명상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간입니다. 가장 명료한 정신 상태인 이 시간에 침대에 누워 세계를 통찰하는 것이 훨씬더 좋은 하루를 시작할수있는거 아닌가요?”
“뭐라는겨 이새끼는...”
여덟살에 예수회 학교에 들어간 데카르트는 이때부터 늦잠 자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데카르트는 오전 열한시까지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철학을 다듬어 갔던 것이다.
건강에도 좋고, 철학에도 좋은 방법이었다. 이런 늦잠의 결과물이 바로 ‘방법서설’이었다.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구원이라는데 그거 다 구라야. 학문의 진짜 목적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되는 것’이야.
그리고 모든 학문하는 이들의 기본 연구 방법은 수학적이어야해. 일단 의심부터 해야해! 이게바로 ‘방법적 회의’라는건데 생각해봐.
신학이라는게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게 신앙심이야. 일단 믿고 시작하는데 이게 학문이 되겠어? 학문의 기본은 의심이야! 일단 의심해야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그의 주장은 일게이들에겐 옳거니! 씨발 ㅇㅂ준다겠지만 그당시 사회에겐 ㅁㅈㅎ감이었다.
이제까지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되던 ‘신의 존재’를 의심한 것이다. 30년 전쟁으로 기독교의 권위가 흔들리던 그때 난데없이 등장한 데카르트의 일격.
교회는 흔들렸고, 사람들은 데카르트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데카르트의 이런 급진적인 주장이 인기정보글로 ㅇㅂ를 많이 받자 기독교측은 반발했다.
“그 새끼 순 나쁜새끼에요”
“그치? 학문하는건 좋은데, 왜 애꿎은 신을 들먹이는거야?”
“성경 자체도 부정했대요”
분위기가 슬슬 묘해지고 예전만 못해도 이때까지의 교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 좆됐다... 이러다 붙잡혀가서 화형당하는거 아냐?... 괜히 책 써서 인실좆될거같은데 어쩌지?... 법게이들아 앙망한다...”
철학적으로는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 위대한 선지자나 다름없었지만, 일상에서의 데카르트는 소심한 학자였다.
“예전에 갈릴레이 벤먹은거처럼 나도 그꼴날거같은데... 그냥 조용히 살까?..."
이런 소심한 성격은 책이 출판되기 전에 네덜란드로 이민을 갈 것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이때 당시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오른 나름 잘나가는 나라였다.
근데 그는 단지 강대국이어서 네덜란드에 간게 아니라 바로 네덜란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국민성 자체가 오픈 마인드라 자신과 다른 주장을해도 용인을 했었고, 이민자에게 두유노우 히딩크?를 물어보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21년간 숨만 쉬며 지내게 됐는데..
아무리 오픈마인드의 네덜란드라도 데카르트의 급진적인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데카르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한다!”
“데카르트 그새끼 순 빨갱이새끼처럼 위험한 사상가다!”
점점 데카르트를 옭죄어 오는 유무형의 압력들, 이제 네덜란드도 위험한 땅이 되었다.
근데 인생과 일베는 타이밍이라고 갑툭튀 나온것이 스웨덴의 여왕인 크리스티나였다.
“내가 요즘 교양을 좀 쌓아야 할거같은데 철학 좋잖아? 페북에 사진올리기도 있어보이고~”
크리스티나 여왕은 철학 과외선생을 찾고 있었고 데카르트에게 권유하자
데카르트는 일단 살고봐야했고 조여드는 압력 속에서 스웨덴행을 택한다.
그런데 이 스웨덴행으로 노짱 따라갈줄이야 누가알았겠나...
“데 선생? 내가 아침형 인간이거든? 내 과oisu업은 오전 다섯시부터 했으면 좋겠어. 이른아침에 머리가 제일 잘돌아가잖아. 맑은 공기 마시며 철학을 논하는거 멋있을거같애”
“저기... 오전 다섯시는 아침이 아니라...새벽 아닌가요?... 쓰레기차 올때 꿀잠자는게 최고였는데 그때 일어나라고요?... 전 11시까지 늦잠 자는 스타일인데...”
하지만 갑은 여왕이다. 데카르트는 쫓겨나서 뒈지기 싫으면 해야지 어쩌겠나.
5시에 비몽사몰 강의하던 데카르트...
그의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게되고, 원래 늦잠으로 체력의 열세를 극복하던 데카르트는 늦잠을 못잔것도 문제였는데, 추운 북국의 새벽공기의 어시스트로 인해 얼마뒤 폐렴에 걸리고 그대로 약한번 못써보고 노짱따라 가게된다.
만약 행보관같이 일찍일어나는 여왕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늦잠을 보장해주었다면, 데카르트는 더 오래살면서 인류에게 혁신적인 철학의 방향을 제시했을지도 모른다.
4. 제임스 가필드
미국의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 (James Abram Garfield)
16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운하에서 일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뻔한 고비를 넘겨 특별법은 못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 좀더 훌륭한 일을 하라고 살려주신거다 굳게 믿고 대통령까지 오른 인물이다.
근데 이사람은 대통령이 된뒤로는 큰일을 하지못하고 취임선서하고 백악관 입성 4개월만에 공무원인 찰스키토가 쏜 총에 맞는다. (천조국 재규어네..)
<천조국 20대 대통령 제임스 A.가필드>
1881년 7월 2일 워싱턴역.
갑자기 뛰어든 찰스키토 44구경 브리티시 리볼버를 꺼내는데...
“공무원 연금폐지 반대한다! 대통령은 하야하라!”
이딴말없이 그냥 쏴버렸다. 빵야!
불행중 다행으로 대통령을 즉사시키진 못했고 총알은 대통령의 갈비뼈로 쏙 들어갔다.
“아 씨발...존나 아파 나죽는다... 비서실장 사진찍어줘 이거 만베감이다..”
그때 비서실장대신 현장에 있던 대통령의 주치의 블리스가 얼릉 달려와 살펴보는데
블리스박사는 일단 총알 꺼내는게 급선무라 생각하고 탐침봉을 꺼냈다.
그런데 워싱턴의 7월.... 뜨거운 여름 더위아래서(난 미국안가봐서 모르는데 워싱턴 여름이 많이 덥냐?)
열심히 탐침봉이라 불리는 철제봉으로 대통령 갈비뼈사이로 쑤시고 뒤적거리지만 총알이 안보인다...
“야이 씹새끼...니살아니라고 막쑤시는거같다?... 아 씨발... 아...”
마취도 없이 현장에서 즉석으로 한 총알찾기는 오히려 상처부위를 넓게 벌려놨다....
하지만 블리스 박사의 결정적 실수는 총알을 못찾은게 아니라 소독을 안한것이었다.
이때 당시 수많은 외상환자들이 생명의 위협이 없는 상처에도 소독미흡으로 인한 2차 감염에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박사라는 새끼가 이를 전혀 고려하지않고 소독하지 않은 탐침봉으로 붕가붕가쇽쇽하며 대통령 옆구리를 벌집으로 만들어놨다.
하지만 하나님이 큰일하라고 한번 살려준 가필드 대통령 아니시던가...
“너 이 씹새끼...백악관 가서 보자...아흑...”
아직 살아있었다.
근데 블리스 박사... 탐침봉으로는 안되겠는지 이젠 손가락으로 쑤신다...
신의 손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옆구리가 시오후키할때까지 쑤셨는데 또 못찾았다...
상처는 총탄 맞은 상처보다 더 커졌고, 환부는 검푸른 색으로 변해갔다.
“...야...총알 찾았냐?...”
“.....일단 백악관으로 가시죠...”
“.....”
백악관으로 옮겨진 대통령은 고열과 발작으로 위기였다 안정됐다를 반복했다.
시간은 흐르고... 미국의 난다긴다하는 의사들이 몰려왔는데 분위기는 총알만 찾으면 상처는 낫는다 총알부터 찾자였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소독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거다...
또 열심히 대통령의 환부를 쑤셔대고 그때마다 대통령의 상태는 더 안좋아졌다.
상처는 더 커지고 색은 이제 검푸른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이때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전화기의 애비이자 희대의 발명가가 등장하는데...
태통령이 총맞아 뒈져간다는 소식을 듣고 금속탐지기를 들고 온것이다.
전화기 만들때 기술을 응용해 전자석으로 만든 금속탐지기로 총알을 찾아 나서는데
“삐삑”
신호가 잡혔다
총알은 상처부위 훨씬 깊숙한 곳에 박혀있었다... 그동안 엉뚱한데만 쑤신거다...
씨발 의사새끼들 패죽이고 싶겠지만 반송장이니 어쩌겠나...
그러자 이젠 째서 총알을 찾자로 바뀌었다. 씨발 ㅋㅋ
상처를 쨌는데.... 역시 총알을 발견못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의료진은...
“에....기상관측 사상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 워싱턴의 기온은 대통령의 건강을 위협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대통령을 시원한 바닷가... 뉴저지같은데로 옮길까 합니다...”
엉뚱한데서 핑계를 찾게된다...
결국 대통령의 마지막 여름휴가를 위해 뉴저지까지 호송을 하였지만...
대통령은 그해 9월 9일, 79일간의 사투 끝에 사망한다. (하나님이 존나 큰일하라고 계속 힐줬는데도..ㅠ)
죽음 이후 시신을 해부한 결과 총알은 환부의 10인치 아래 깊숙이 박혀있었고, 사망의 원인은 총상이 아니라, 의사들의 부주의에 의한 감염이었다.
이미 1860년대 영국의 조지프 리스터에 의해 소독약을 활용한 수술 기법이 나온 상황이었지만, 미국 의료진들은 이를 무시했던것이다...ㅉㅉ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소독 기숙이 미국 의료계에 보급되었다는 점과
벨의 금속탐지기가 지뢰탐지기로 발전해 인류에 이바지했다는 점ㅋ
하나님이 크게 쓰기 위해 목숨을 살려 줬다고 믿었던 가필드 대통령은 본인의 죽음으로 인해 인류가 혜택을 얻기위함이었는지는 몰랐나보다.
*참고문헌
『세계 역사를 뒤흔든 인물 오류사전』 조재선 지음, 지원북클럽, 2003.
『아이러니 세계사』 이성주 지음, 추수밭,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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