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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이긴 하지만, 사진 스압도 좀 있을거야...)
안녕, 게이들?
평소 고려사를 좋아하는 게이로써 이 주제로 글을 쓰기 좀 조심스러웠어.
왜냐하면 고려사에 대해서 깊은 애착이 있고, 왠지 모르게 관심이 자꾸 가지는 나라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고려의 좋은 모습을 자꾸 부각시키고 싶지만,
나름대로 흑역사적인, 헬고려의 면모도 함 보여주고 싶어서 이 주제의 글을 준비했어.
철저히 사료 내용을 기반으로 글을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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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도 양계
위 지도는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이야.
5도는 지방 행정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양계는 위치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군사적 요충지이자, 고려의 국경 지대야.
물론 나중에 고려 후기에 가면 특수 군사 구역으로써의 양계의 기능은 쇠퇴해버려.
한국 영화, 천년호에서의 신라 진성여왕
우선 고려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해.
우선 문무왕 때 신라는 삼한(三韓)을 통일했고, 신라 역사상 최대의 융성을 이루게 되었어.
그러나 골품 제도의 모순, 또한 내전과 왕위 다툼으로 인해서 국정은 문란해졌고,
김치녀 진성여왕은 사치와 향략을 저지르며 나라를 파탄내게 되버려.
나라의 국운은 쇠퇴하는데, 신라의 지배층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어.
신라 왕실은 백성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독촉했고, 급기야는 성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돼.
그리고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국에 있는 신라의 지방관들이 줄줄이 살해당하게 되버려.
이는 신라가 지방에 대한 통제 · 행정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해.
이렇게 신라 말기에는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쇠퇴하자, 당연히 지방 세력이 성장했었지.
이들을 '호족'이라고 부르는데, 이 글을 보는 일게이들은 이제부터 호족이란 단어를 항상 주목해야 해.
지방 호족 중에서 견훤은 전라도에서 5천여 세력을 형성하여 백제의 왕이 되었고,
궁예는 양길의 휘하 장수에 있다가, 독립하여 고구려의 왕이 되었어.
그러나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로 인해서 축출되었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918)하면서 삼국 쟁패의 시대가 열려.
백제의 견훤은 신라의 서라벌(현 경상북도 경주시)까지 진격하여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고,
신라를 도우러 온 고려군을 공산 전투에서 격파해버리고 수천여 명을 도륙해버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이후 고려에서는 뛰어난 명장(유금필 등)들의 활약으로 백제는 밀리기 시작했고,
백제 내부에서는 여러 반목이 존재했기에 국력이 쇠약해졌어.
결국 고려는 모든 전력을 기울여 백제를 멸했고, 마침내 삼국은 고려의 기치 아래 하나로 통일돼.
고려가 비록 삼국을 통일했지만은, 사실 완전한 나라라고 보기 힘들었어.
거의 봉합 수준으로 나라를 메꾼 것이고, 고려는 사실 '호족 연합 국가' 수준에 머물렀을 정도였지.
지방 호족들의 입김이 여전히 막강했으며, 왕건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돼.
바로 전라도 나주 출신의 왕후 오씨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는데, 이 사람이 왕무(고려 혜종)야.
그러나 왕무의 집안(전라도 나주)은 힘이 매우 약했고, 당연히 호족 연합 국가 고려의 한계상,
여러 문제점이 터질 것은 분명해보였지.
후삼국 통일전에서 전라도 나주는 매우 중요한데, 후백제 턱 밑에서 칼을 겨누고 있었던 형국이니.
아무튼 왕건이 죽자, 혜종이 즉위했지만 재위 내내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물론 자객이 혜종을 암살할려고 하자, 혜종은 맨주먹으로 자객을 두들겨패는 무공을 토하지만,
계속되는 암살 위협에 혜종은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았지.
혜종은 자신이 암살 위협을 받고 있었음에도 조사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속으로 감추고 있었어.
조사 명령을 실시하면, 암살을 사주한 호족들이 불안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지.
이후 고려 광종 때에는 강력해진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고,
호족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한 노비를 해방시켜주는 조치를 취했어.
심지어 중국인 출신을 자신의 측근으로 기용했고, 과거제도 실시했었지.
이후 고려 성종 때에는 왕실의 힘을 지방에 투여하기 위해서 중앙 집권 체제를 위한 노력을 하게 돼.
성종 이전까지는 제대로 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는데, 성종은 12목을 설치함으로써 지방에 고려 정부의 힘을 뻗치게 하지.
그러나 여전히 고려는 호족들의 힘이 강성하여 별 실효를 거두진 못하였고, 바둑의 포석이라고 봐주기도 애매하고 조잡했지.
아무튼 고려가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북방에서는 거란이 고려에 쳐들어와.
물론 서희가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성과를 세우게 되지.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고려라는 나라는 중앙 정부의 힘이 변방이나 지방에 널리 뻗치지 못했기에,
국경 장수들이 월권 행위를 벌이는 경우도 잦았어.
이 시기 조정의 명을 받지도 않은 하공진이 동여진을 공격했다가 대패하는 일이 벌어졌고,
유종은 고려 조정에 조회할려고 국경에 들어와 있던 여진 수행원 95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져.
이 모두가 중앙 정부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변방 장수 개개인의 앙심 때문이었어.
(나중에 병마사 김희제가 1만 군대로 국경을 넘어 군사 행동을 하는 월권 행위도 벌어짐)
결국 고려에 앙심을 품은 동여진은 거란에게 고려의 내부 사정(강조의 정변)을 완전히 까발리면서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했고, 그 일환으로 요 성종은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게 됨으로써 제2차 여요 전쟁이 시작돼.
이때 행영도통사 강조는 호족들의 힘을 얻어서 전국에 있는 병력이란 모든 병력을 긁어서 30만 대군을 편성하게 돼.
그리고 검차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거란군을 몇번 격퇴했지만, 강조가 경계를 풀게 되면서 거란군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지.
참고로 여기서 고려의 30만 대군은 하나의 통일된 군이 아닌, 어중이 떼중이로 이루어진 군대였어.
실질적 중앙군은 전체 군의 1/10 수준인 겨우 '3만 명'이었지.
거란군은 강조가 이끈 중앙군 3만을 집중 공격하였고, 그리하여 고려 중앙군 3만 명은 모두 전멸하였어.
중앙군이 궤멸됐으니 어떻게 됐을까?
어중이 떼중이로 이루어진 30만 대군은 금방 와해되었고, 강조는 포로로 잡히게 되고 항복을 거부하자 곧 참수당해.
중앙군이 궤멸됐으니, 당연히 고려는 수도 개경까지 훤하게 길이 뚫리게 되었고, 거란군을 막을 수 없었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려 현종은 수도를 버리고 전라도 나주로 파천하게 돼.
이때 서경(평양)에서는 아예 거란에게 항복을 결정하고, 서경을 구원하러 온 고려군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해.
아무튼 현종은 파천을 결정했고, 이 난국 속에서 관료 · 병사 · 수행원 거의 모두가 도망가고,
현종 옆에는 달랑 지채문 및 신하 등 병사 50명이 전부였었지.
심지어 전쟁을 주장했던 장수들도 모두 왕을 버리고 도망갔어.
이것은 고려 국왕의 왕권이 그렇게 신하들에게 있어서도 보잘거 없음을 보여줘.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어.
현종은 적성현(현 경기도 연천시)에 이르렀지만, 일개 관아의 아전이란 자가 왕에게 저런 무례를 범했던거지.
그렇다고 아전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에, 그를 질책할 수도 없었지.
아무튼 현종은 아전의 말을 듣지 못한척 하였어.
그러자 아전은 활시위를 당겨 현종을 위협했고, 아전이 거느린 군대가 왕을 공격할려고 했어.
임진왜란 때 파천했던 선조도, 병자호란 때 파천했던 인조도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지만,
당시 고려는 여러 한계상 문제점으로 인해 왕의 권위가 확실하지 못했고,
아직도 '제대로 된' 중앙 집권적인 모습도 형성하지 못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무리들은 계속 왕을 위협했고, 왕 옆의 일부 신하들은 지채문을 제외하고 거의 도망가버려.
또한 현종 자신도 얼마나 급했던지, 왕비를 버리고 중간에 뛰어 다니면서 도망갈 정도로 사태는 급박했지.
게다가 거란군 선봉대가 현종 일행과 거의 수십 리 밖에 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많은 대중들은 모르지만 사실 이때 고려는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었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어.
현종은 다른 신하들처럼 자신을 지키던 지채문 역시 도망갈까 두려워했고, 지채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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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약 주상 전하를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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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거란군 선봉 부대가 현종 일행과 너무 가까워지자, 현종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때 하공진이란 신하가 "고려의 남방은 수천 리에 달하며, 고려 왕은 이미 그 밖까지 도주했다."라면서 거란 황제를 속이며,
당연히 고려의 지리를 잘 알지 못했던 거란 황제는 이를 믿고 철수했지.
그러나 하공진은 인질로 잡히게 되었고, 이후 거란군에 의해 심장과 간이 꺼내어져 잔인하게 죽게 돼.
뭐 아무튼 거란군은 퇴각하다가 양규와 김숙흥 등의 활약으로 많은 병사가 죽었고,
제2차 여요 전쟁은 이렇게 고려군이 마지막에 큰 전공을 세우면서 막을 내려.
하지만 거란군에 의해 서북방 일대와 개경이 거의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의 원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전쟁으로 인해 국가 조세가 감소하고, 경제가 거의 파탄날 지경이었는데,
이로 인해 문신 관료들의 녹봉을 지급해주지 못할 처지였어.
그럼 이걸 어떻게 해결했냐? 라고 물을텐데.
조국 고려를 위해 싸웠던 군인들의 땅을 빼앗아서 문신 관료들의 녹봉을 충당했어. ;;
결국 김훈과 최질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쳐들어가서 자신의 땅을 빼앗은 문신들을 매를 때려 거의 죽게 하고,
현종을 보고 다음과 같이 호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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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발뒤꿈치를 잘라서 신에 맞게 한다면 몸이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가 원망을 견디지 못하니, 청컨대 나라의 좀을 제거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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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군인에 대한 처우는 그리 좋지 못한거 같긴 해.
아무튼 현종은 장수들의 기세에 기겁해서 그들의 요구를 허락했고, 잠시나마 일부 문신들을 유배를 보내.
그러나 현종은 화주방어사와 함께 계략을 짜서 반란군 장수들을 제거하고, 유배를 보낸 문신들을 다시 복권해.
이후 고려는 흥화진 · 귀주에서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대거 섬멸했고, 잠시나마 고려는 융성기를 맞이하게 돼.
그리고 고려의 태평성대였던 문종의 치세 때 절정에 달하게 되지.
그러나 고려는 여러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문벌 귀족들은 고려 12세기에 크게 풍미하게 되지.
이들은 대토지를 소유하며, 공음전을 통해 많은 혜택을 누렸고,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하는 등 이런 일들이 벌어져.
심지어 자기 애비를 잘 만나면, 음서제라는 것을 통해 높은 관리에 진출할 수 있었으니.
이 과정에서 이자겸 같은 놈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실이 위험에 처했으니, 당시 고려가 얼마나 막장인지 가늠할 수 있고.
왕실을 외척들인 문벌 귀족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게다가 고려는 무과라는 시험 자체가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문신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었어.
조선도 부분적으로 음서제가 있긴 하지만, 고려에 비해선 그렇게 강하진 않았어.
아무튼 무과 시험이 없다 보니깐, 무신들의 힘은 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문신들이 무신들을 차별하고 농락하는 일도 벌어져.
대표적으로 문신 김돈중이란 사람이 무신이었던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는 일도 있었던거지.
결국 무신들은 폭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문신들의 목을 대거 참수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게 돼.
그렇지만 무신들 내에서도 여러 파벌이 있었기에, 이들은 주도권을 잡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당연히 그 돈은 백성들을 수탈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했지.
결국 무신 정권기 내내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수십 회 정도 대규모에서 중소규모까지 다양한 민란이 일어나.
아예 최광수나 이연년 같은 얘들은 고구려 · 백제 부흥 운동을 선포하면서 반란을 일으켜버려.
무신들끼리도 서로 죽이고 죽이다가, 결국 최씨 정권이 무신 정권을 안정시키고 자신들이 오래 해먹었는데,
무려 4대 60년(← 세습) 동안 고려 왕조를 주물딱거리면서 자기들끼리 헤쳐먹었어.
역시 고려 체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국정은 파탄났고, 특히 최충헌 같은 새끼는 왕을 무려 4번이나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해냈지.
게다가 무신들로 인해 오히려 고려의 정규군 체제가 붕괴되는 현상이 가속화되버려.
고려의 정규군을 자기들의 사병으로 편입시켰고, 그러다보니 국경을 지킬 병사들이 줄어드는거야.
심지어 1217-18년에 거란인 9만여 명이 고려를 쳐들어왔는데, 이를 막고자 올려보낸 군사는 겨우 1만 3천이었어.
그러나 이마저도 허약한 병사들이었고, 최충헌은 출정군을 사열하면서 건장한 사내들은 자기 사병으로 넣어버려.
그래서 개경 성벽에는 허약한 병사들이나, 문관들이 지키는 막장 수준이었고,
아! 참고로 최충헌 저 미친 새끼는 국경에서 급한 보고가 올라왔음에도 전령을 귀양보내는 병신력을 보여줘.
그래서 국경 장수들은 성이 2-3개 함락될 때에야 급기야 전령을 보내게 되었고,
그땐 이미 개경까지 쭈욱 뚫린 상황. ㅇㅇ
싸우고자 자원하면 그냥 섬으로 귀양보냄.
참고로 저때 거란군은 강원도 경계까지 들어와서 깽판칠 수준이었고,
최충헌은 자기 사병들 사열하면서 위용을 뽐내고, 사치와 향략, 연극을 벌이는 정도였으니... ;;
그리고 고려 정규군 체제가 붕괴되었다고 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어.
저건 모 역사 카페에 내가 올렸던 자료를 가져온건데, 일베에서 다시 써먹네.
몽고군이 고려를 처음 침입했을 때 3만 규모로 쳐들어왔는데, 그럼에도 고려는 개경 근처까지 쭈욱 털리고,
경기도 광주와 충청도 충주 · 청주까지 몽고군이 와도 이를 막을 수 없었어.
그럼 일게이들이 반문할 수 있겠지.
고려 최충헌
Q. 몽고군 쌘거 모르냐? 아니 저렇게 털릴 수 있지!
당시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은 중앙 정규군이 아니라, 사실 여진 · 거란 · 한인 등 잡다한 군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고려 침공 몽고군 : 2-3선급 중하위 수준, 피지배 민족 혼성 부대)
나중에는 겨우 1만여 명의 몽고군이 쳐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다 털리고,
심지어 몽고군이 털어먹을게 없어서 전라도와 경상도 인근 섬까지 털어먹는 일이 벌어져. ㅇㅇ
정규군이 붕괴됐으니, 막을 수 있는 군대가 없으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거지.
물론 어느 정도 정규군 수효는 있었겠지만, 얘들 다 어디로 갔냐고?
어디로 가긴, 강화도로 튄 최씨네 집을 지키고 심시티하러 갔지~
고려와 몽고의 전쟁이 장장 30년, 그러나 몽고군이 실질적으로 고려에 머문 시기는 11년인데,
한해 동안 206,8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라고 하며,
거쳐 간 고을들은 잿더미가 되었다고 하니, 이건 해도 너무한거지.
귀주성, 자모산성, 처인성에서 몽고군을 격퇴한다고 해도, 몽고군을 막을 정규군이 없었기에
몽고군은 그냥 다른 곳으로 우회해서 지나쳐도 되지.
이렇게 몽고군의 침공으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초토화가 되었고, 비교적 피해가 덜했던 동해안 접경의 함경 - 강원 라인은
몽고의 지배를 받았던 동진군 잔병들의 공격으로 초토화가 되버려.
그렇지만 육지 백성들이 죽든 말든 그런거 최씨 정권은 관심없었고, 사치와 향략 벌이기에 급급했지.
내가 예전에 일베에서 대몽 항쟁 당시 최씨 정권 비판글을 올렸을 것인데, 궁금한 사람은 봐봐.
교과서가 국뽕 제대로 쳐먹어서 이 대몽 전쟁을 가지고, "고려가 몽고에 자주적으로 맞서 싸운 전쟁"이라고 하는데,
현실은 안전한 섬으로 피했던 백성들이 동계 병마사 신집평을 살해하고 몽고에게 투항하거나,
아예 서경 일대로 기어 들어와서 몽고군 관리 홍복원의 통치를 받거나,
아니면 아예 조휘와 탁청 무리는 동계 일대 화주 지방을 그대로 바쳐서(후일 쌍성총관부)
고려는 영토도 상실해버려.
지배층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강화도 심시티에 열중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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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계를 정복해 나가던 몽골군을 상대로 정규군도 없던 고려가 30년간이나 저항했다는 것은 몽땅 소설입니다. 더구나 당시 주변에서 세를 떨치던 나라들은 모두 막강한 기마군을 보유한 유목국가들인 요, 금, 원 등이었습니다. 고려는 사실상 100년간 몽골의 식민지였죠. 그런데 대몽 항쟁으로 윤색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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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려는 몽고에 항복했고, 원의 부마국이 되었어.
고려는 원의 온갖 수탈과 횡포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고, 일본 원정으로 인해 무리하게 물자가 징발되면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안가에는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어.
아무튼 몽고와의 전쟁으로 고려는 전 국토와 요새가 황폐해졌기에 방어선에 노출이 심했고,
카다안의 무리가 2만의 규모로 고려를 침략하자, 고려는 충청도 천안시까지 바로 뚫리게 돼.
왕은 강화도로 피했고, 수도 개경은 또 다시 방치됐지.
충렬왕(이 시기는 고려 왕실과 몽고 황실의 피가 섞임)
2만의 무리가 쳐들어왔음에도 고려는 막을 힘이 전무했고, 결국 자신들의 응딩이였던 원나라의 힘을 빌렸어.
쿠빌라이는 "아 ㅆㅂ 고려 너희들 예전에 당 태종도 막고 그랬는데, 그깟 도적떼 때문에 털리냥께?"
라면서 츤데레 정신을 발휘해서 군사 1만을 파병했어.
원나라군이 오는 사이에, 이미 합단은 동계를 침략해서 사람을 죽여서 그걸 식량으로 쳐먹고, ㅁㅊㄴ ;;
여자들을 강간하고 포(脯)를 떴다고 했으니, 민심은 당연히 개판이었지.
그러나 고려의 ㅍㅅㅌㅊ 중흥 군주였던 공민왕은 다시 고려의 국운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게 돼.
붕괴되었던 고려의 정규군 체제를 복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병력은 확보할 수 있었어.
몽고 잔당을 없애고자 많은 노력도 하신 양반이구.
그러나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원나라에 맞서 홍건적이 난을 일으켰고,
원나라군의 토벌에 밀린 홍건적들이 떼거지로 고려로 밀려 들어오게 돼. ㅡㅡ ;;
홍건적 4만의 침입으로 고려는 서경(평양) 근방까지 모든 방어선이 무너졌고,
의주, 서경, 정주 등지의 국경 지방 백성 1만여 명의 목을 참수하고 불에 태워 죽이는 등 대학살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러.
고려군은 공민왕이 겨우 복구했던 2만의 정규군을 올려보냈지만,
보병을 기병보다 먼저 진격시키는 바람에 기병에게 짓밟혀서 1천이 사망해.
그리고 고려 정규군이 북방에 있자, 왜구가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가에서 난리 부르스를 치는건 덤이고. ;;
이후 홍건적은 10-20만 대군으로 대규모로 침입해 들어왔고, 공민왕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피난하기로 결정해.
인근 지역에서 홍건적들의 학살과 약탈 등 분위기가 굉장히 흉흉했기에,
이는 당시 기록이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있어.
어미가 자식을 버리고, 피난 행렬로 짓밟히는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하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 수 있지.
고려는 이때 멸망 위기였지만, 공민왕은 고려를 지켜내기 위해서 정말 없는거 다 쥐어짜내서 병력을 모집해.
어느 정도였냐면...
신료들을 전국에 풀어서 모병하게 하였고, 모집에 응하는 관 · 사노비들은 양민으로 해방시켜준다고 하였어.
이러니 많은 노비들이 모병에 응했고, 그렇게 해서 2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부대를 만들어.
당연히 이렇게 모집했음에도 뒷수습이 또 감당이 안됐지만(무리한 모병으로 경제 파탄)...
이때 이성계는 가병 2천으로 개경 탈환에 참전하였고, 마침내 개경 선의문을 먼저 돌파하는 큰 군공을 세우고,
고려군 20만이 해내지 못한걸, 이성계는 20만의 1/10 규모인 2천으로 개경 탈환에 엄청난 공적을 세우지.
이 기세를 몰아 고려군 20만이 진격해서 홍건적 10만을 참살했고, 이인임과 안우, 이방실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의 난은 평정돼.
그러나 개경은 참혹하기 그지없었고,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지.
개경을 점령했을 당시의 홍건적들은 사람을 잡아서 불에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임산부의 젖을 잘라서 구워 먹는 잔인한 짓을 마음대로 저질렀다고 했을 정도니.
홍건적의 난을 평정했지만, 이번에는 왜구가 가만두지 않았어.
왜구는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만 규모로 쳐들어와서 고려 내륙 지방까지 진격하는 등
큰 위세를 떨쳤고, 심지어 고려는 영토를 잃어버리는 대참사도 일어나.
원수 김진의 대패로 인해 경상도 대부분이 왜구의 손아귀에 떨어지기도 했고,
곳곳에서 왜구의 학살과 약탈, 강간 등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보았지.
강화도는 왜구가 개경을 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았고, 이미 강화도는 왜구에게 공략된 적이 몇번 있었기도 해.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왜구가 강화도를 쳐서 곡식 4만 석을 털어먹었으니.
왜구가 얼마나 쳐들어왔냐면, 위 지도를 통해 짐작했겠지만은.
한해에만 해도 미친듯이 쳐들어온다.
다 캡처하면 진짜 개스압이기에 저것만 캡처했고, 왜구의 공격(침공) 횟수가 400-500회가 넘어간다.
고려군이 없는 살림 쥐어 짜내서 모아둔 수백 척의 함선도 불사르고, 전라도와 경상도는 기본이요,
충청도와 강원도, 개경 앞마당까지 쳐들어오니...
고려군은 몇번의 삽질로 군사 5천이 죽는 대패를 당했으며, 1천이 포로로 끌려가거나
원수의 깃발이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지만, 물론 최영, 이성계, 정지, 최무선 등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두기도 함.
그렇지만 왜구는 여전히 계속 쳐들어왔고, 최영이나 이성계도 몸이 하나인지라 사방에서 터져오는 암덩어리들을 막을 수 없었지.
겨우 봉합하는 수준에 그쳤으니.
그래도 난세에는 영웅들이 나오는 법이야.
최영(목호의 난 평정)과 이성계 등이 그러했어.
특히 이성계가 남북을 종횡무진하며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암덩어리들을 격파했고,
나하추, 박의, 덕흥군, 조무, 여진인의 반란, 호바투 등을 평정하는 큰 군공들을 세웠으니.
특히 대왜구전에서는 황산 대첩(현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왜구 1만여 명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게 돼.
참고로 이성계가 나중에 위화도 회군을 하고 나서도, 왜구 개새끼들이 사방에서 준동했기에
그 군대를 왜구 토벌에 보냈다고 했을 정도였어.
더 적고 싶은 내용도 많고, 자세히 쓰고 싶긴 하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면(충분히 긴가 ;;) 문제가 생기니깐 여기서 마무리 함.
<3줄 요약>
1. 고려는 호족 연합 국가로 출발했기에 여러 문제가 있었음.
2. 무신에 대한 차별, 결국 무신들이 난을 일으키고 군의 사병화가 진전되면서 고려 정규군(2군 6위) 체제 거의 붕괴
3. 정규군의 붕괴로 인해 외적의 침입에 큰 힘을 쓰지 못했고, 말기에 엄청난 외적들의 공격으로 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됨.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조병찬 저, 고려왕조실록
- 고려의 해도입보책과 몽고의 전략 변화
- 임용한, 전쟁과 역사
- 고려의 대몽항쟁과 대장경
- 국방부 자료, 대몽항쟁사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1988
- 국방부 자료, 왜구토벌사 國防軍史硏究所 1993
- 네이버 모 역사 카페에 내가 올렸던 글들 참고
- 위키백과, 엔하위키, 네이버 백과사전 등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