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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

과정 2017. 10. 26. 10:57



우선 3줄요약 먼저 던져놓고 시작:

1. 현재 우리가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상식과 문화들이 알고보면 서양에서 유입된 것이 많다.
2. 그래서 현재 서양적 사고는 일상언어로 풀기 쉽고 알아듣기 쉬운데, 동양적 사고는 생소해져서 많이들 모르게 되었다.
3. 그러므로 동서양을 알려면 일단 이 '생소함'에 대한 기초적 감을 정확하게 잡아야만 비로소 정확히 이해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씹스압인 이유는 내용이 많아서가 아니고, 쉽게 풀어서 썼기 때문이다. 일단 읽다보면 재밌게 읽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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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이 글은 무슨 글인고?

II. 동서 문화 바로보기
 1. 일상생활에 스며있는 서양문화
  (1)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2) 이성이란 무엇인가?
  (3) 실체란 무엇인가?
  (4) 자유와 평등이란 무엇인가?
  (5) 이분법적 사유
 2. 동양비판에 숨은 서구편향적 잣대
  (1) 논점선취의 오류: "너 요즘도 마누라 때리냐?"
  (2)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
  (3) 무지에 기인한 맹목적 광신
   
III. 일베간 링크글에 대한 응답
 1. 화성음악과 단선음악
 2. 서양문자와 동양문자
 3.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4. 분석적 과학과 기술
 5. 동양철학에 대한 오해
 6. 기하학(수학)과 증명

IV. 동양과 서양을 대하는 자세 제언

V. 길어서 똥송한 세줄요약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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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이 글은 무슨 글인고?

전체적 내용은 위의 목차를 참고하면 한눈에 들어올 것이고, 사상가들을 알아보고자 하는 게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번 편에서는 사상가들을 비교하기 전에 기초적 감만 잡을거다. 그 감이 잡히지 않으면 객관적 파악 자체가 불가능하거든. 구체적인 사상가나 철학이론은 리플 달리는 반응 봐서 후일 쓰기로 약속하마. 이 글을 읽은 게이들은 리플 마음껏 달아도 된다. 제3자(일반인)의 시각은 큰 도움이 된다. 내 욕 해도 좋으니까 하고 싶은 말 마음껏 하고 가라.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글은 원래 정보글 의도로 계획된 게 아니었어. 처음에는 어제 어떤 일베글(https://www.ilbe.com/4340284287)이 정보가 너무 날조되어 있길래 저격글을 작성했었지. 그런데 쓰다보니까 이걸 이해를 시키려면 좀더 기초부터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실제 사례들로 구성한 해설을 상당히 덧붙였고 결국 본래 의도와 달리 대체적으로 정보글에 가깝게 되어 버렸다. 읽는 너희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편이 더 유용할듯 싶다.






1. 일상생활에 스며있는 서양문화

첫 번째 제목을 왜 이렇게 달았냐 하면, 우리가 무의식중에 쓰는 언행이 알고보면 서양에서 들어온 게 생각보다 많다는 걸 우선 알아야 해서 그래.


 (1)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알다시피 자연과학에서 밀리는 동양은 막강한 현실적 파워 앞에 서양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구제국주의가 동양에 침투했고, 그 결과 서구문물이 급격하게 유입되기 시작하지.

사실 서양문화든 뭐든 좋은것만 가려서 받아들이면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런데 문제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서양문화와 다른 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부감부터 느낀다는 점에 있지. 그것은 서양문명이 그토록 추구해 왔던 합리주의 정신에 우리 스스로가 위배되는 꼴이야.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부터 가진다면 솔직히 좌좀들과 다를 게 없잖아?

사실 이건 우리 개개인의 책임보다는 한국 공교육과 사회환경의 책임이야. 역사교육을 통해 좌좀들이 생긴 이유가 뭐겠냐? 역사를 시비로 판단하지 않고 선악으로 판단하게끔 배웠기 때문이야. 그런데 비슷한 문제가 과학교육에도 있어. 과학을 비과학적으로 배웠다는 거지. 그러니까, 과학을 ‘맹신’하게끔 어릴때부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뜻이야. 과학이라는 것은 우리 몸으로 체험해서 얻은 감각적 근거라든가, 머릿속에서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는 등의 방법을 쓰는데, 이 방법들이 전부 100% 진리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할 때가 많단 말이야.



그렇다고 과학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야. 과학적 방법이 다른 방법들에 비해 가장 치밀하기 때문에 최우선적으로 신뢰성을 갖는 것은 맞지만, 때로는 과학적 결론을 진리 그 자체로 믿어버리는 일부 과학좀비들이 목청을 높일 때가 있어서 보아주기가 힘들다는 얘기야. 그리고 이러한 과학맹신의 문화는, 과학이 거의 확실하게 밝혀준 분야 외로, 아직 연구단계에 머물러 있는 분야에까지 침투해 있어.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 몇주전 뉴스에 막걸리 얘기가 나왔어. 스쿠알렌이라는 항암물질이 막걸리에 들어 있다는 내용이야. 자 여기서 질문, 그럼 막걸리가 암 예방에 효과가 있겠지?

그렇다고 생각하는 일반인이 아마 대부분이었을 거야. 하지만 이건 비과학적인 논리비약이야. 왜냐하면 막걸리를 구성하는 성분 중 스쿠알렌이 얼마나 비중있는지도 모르고, 스쿠알렌의 건강한 작용을 방해하는 유해성분이 같이 있는지의 여부도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가능한 변수들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 없이 그냥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 가지고 성급하게 판단해버리는 성향이 우리사회 전체에 퍼져 있단 말이야. 과학적이라는 맹신 때문에. 난 이런 현상 일베에서도 많이 목격했었다. 우리 게이들도 늘 신중하자구.


 (2) 이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성적이다” 하면 무조건 좋은 것처럼 느껴지지. 그런데 이 역시 서양의 관점이지 동서를 초월한 객관적 관점은 아니야. 먼저 이성이라는 말부터 보자. 이성의 뜻이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 있어? 그냥 생각하는 능력이라고만 알고 있는 게이들이 대부분일 거야.

이성의 뜻은 계산능력이야.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기하학(원래는 이집트가 원조), 이 기하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이성이야. 그런데 기하학적 질서가 숫자 뿐 아닌 언어생활에 침투하면 어떻게 되겠어? 수리적 질서를 갖춘 언어가 되겠지. 여기서부터 우리가 아는 논리라는 게 나왔어. 이러한 이성능력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가 광장에서 논쟁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되어 가게 되었지.

그런데 서양문화에서 이 이성이나 논리가 중요한 이유는, 변화하는 현실 세계와 상관없이 영원불변한 법칙이기 때문이야. 내가 지금은 착해도 한 대 쳐맞으면 사람 두드려 패는 악한이 될 수 있듯이 사람의 감정은 믿을 수가 없어. 그런데 이성적 질서는 상황에 상관없이 믿을 수 있단 말이지. 이렇게 서양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로 삼고 추구해 온 거야.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감정에 좀처럼 휘둘리지 않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생긴 거야.

머리좋은 게이들은 눈치챘겠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성과 감정이라는 두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이루고 있게 돼. 그리고 감정이라는 변덕스럽고 열등한 놈은 이성이라는 영원불변한 고귀한 놈의 통제를 받아야 하지.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로마제국 이전까지)은 인간과 사회에 이런 통제가 이루어진 상태야말로 선한 상태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희들은 좀 의아할 거야. 아니, 사람한테 이성과 감정이 있다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니냐? 그런데 과연 정말로 당연한 건지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을 나는 하고 싶어. 왜냐하면 이성과 감정을 구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라틴웨스트지역 밖의 여러 인간은 문명을 구가하며 살아왔고, 이 이성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아서 인류사에 죄악을 남긴 예도 많기 때문이지. 자세한 것은 뒤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테니 지금은 생략.

좀더 본질적으로 생각해 볼 점은 이런거야. 왜 이성이 좋은 것이어야 하냐?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이성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비이성적이면 왜 안 좋으냐? 위에서 말했듯이 이성은 원래 계산능력이자 논리력이야. 그런데 이 이성이 강조된 이유는 불변하는 것을 믿어야만 잘 살 수 있는 환경 때문이었어. 그럼 묻자. 지금과 같이 세계가 확 터진 21세기에 꼭 필요한 것이 과연 이성에 대한 집착일까? 삶의 매 순간마다 논리정연한 분석을 통해 살아가야만 할까? 서구논리학에는 과연 하자가 없을까? (기존 논리학에 대한 주된 비판점 중 하나가 평면적 논리에 그친다는 지적이 있음. 참고로만 덧붙여둔다.)

나는 지금 이성이 쓸모없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이성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성에 대한 맹목적 광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거지. 어떻게 살지는 너희들 각자의 자유지만 나는 머릿속에 걸어둘 만한 화두를 하나 던져 본 것일 뿐이니 활용할 사람만 알아서 활용해. 이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이성을 초월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니까. (참고로 나 종교 없다.)


 (3) 실체란 무엇인가?



실체라는 말은 철학용어가 있고 일상용어가 있는데 어려운 철학용어는 쓰지 말자! 일상용어에서 실체란 뭐냐? 실+체, 글자를 풀면 실제몸이라고 할 수 있겠네. 이해하기 쉽게 말을 바꾸면 실체는 사물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거야. 지금 니들이 딸치면서 잡고 있는 핸드폰도 그 네모나게 생긴 모양의 한 실체겠지. 혹은 목이 말라서 마시는 한컵의 물도 실체겠지. 수소와 산소가 결합되어 있는 물질이니까.

그런데 사물이 과연 존재할까? 난 어려운 얘기 최대한 안한다고 했어. 그냥 상식적인 생각을 해 보자고. 컵에 물이 담겨있어. 우리가 볼때 이 물은 컵에 담겨있는 채로 가만 있는 듯이 보이지. 하지만 과학시간에 배웠듯이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어때? 물 분자가 공기나 컵의 분자와 쉴새없이 교류하지. 그렇다면 물에 해당하는 경계선과 공기에 해당하는 경계선을 그어서, 여기까지가 물이고 여기부터 공기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서양과학이든 동양사상이든 간에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해. 하지만 우리가 사물 각각을 실체로서 여겨 버릇하는 사유구조 자체는 서양에서 왔어.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존재란 게 딱딱 떨어지거든. 그러니까, 일상생활에 스며 있는 서양의 영향에 이 실체적 사고방식도 포함되는 거지.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실체적 사고가 현대과학에서도 아직 완전히 극복되진 않고 있어. 그럼 그놈의 실체적 사고라는 게 뭘까?

예를 들면 암(cancer)이라는 거 있지?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10년 전 양의학의 수준만 해도 암세포를 죽이면 암이 치료된다는 발상으로 열심히 암세포 연구를 했어. 이게 실체적 사고야. 그런데 사실 암은 암세포가 근원이 아니야. 암세포가 발생하게 하는 몸 전체의 관리가 잘못된 것이 근원이야. 그래서 암세포를 죽일 방안을 연구하는 것은 인체에 대한 이해는 증진시켜 줄 지 몰라도 암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아, 물론 암치료에 대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긴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 암세포 연구에 더해서 암세포가 증식할 수 없는 인체 전체의 환경 조성 방법까지 연구하는 거거든. 현재 2014년 시점의 성과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10년 전 의학수준은 그랬어. 실체적 사고가 의학에서 한계를 보인 대표적인 사례였지.


 (4) 자유와 평등이란 무엇인가?



이건 일게이들이 좀 익숙하다. 원래는 좀 상세하게 할까 했는데 지금 이미 글이 길어진 관계로 흥미 떨어질까봐,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갈게. 보통 자유나 평등의 개념이 절대적으로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이거 소중한 가치 맞긴 맞지. 그런데 이 역시 서구적 가치이지 보편적 가치는 아니야.

평등이 보편적 가치일까? 우리가 왜 페미니즘을 욕하는데? 페미니즘이 욕먹는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데,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페미니스트들 자신들이 임의로 규정하고 있는 “평등” 개념을 갖다가 문화권을 막론하고 온 세상에 전부 덮어씌우려 덤벼드는 그 폭력성에 있어.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은 평등한 세상이 아니야. “불평등이 조화된 세상”이지. 뭐 이건 일게이들이 다들 이해 잘 할거라고 생각한다. 여성부의 자기모순을 우리는 잘 아니까. (참고로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곧 불평등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 개념에 대해서도 일상생활에 스며있는 예가 많은데 그냥 넘어갈게. 넘 길어진다. 힌트만 주자면 우리가 유럽에 약탈당한 문화재 있지? 그거 돌려받지 못하는 이유가 서양애들이 소유권을 주장해서 그렇다. 쉽게 말하면 동양인들은 소유권 개념이 없어서 소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지만 약탈한 지들은 가져가서 비로소 소유권을 처음 주장했으므로 문화재의 소유권이 지들에게 있다는 논리임. 위에 페미니스트들하고 생각이 비슷하지? 이걸 논점선취의 오류라고 하는데 뒤에서 별도로 다룰 거다.


 (5) 이분법적 사유



이분법적 사유도 니들이 잘 아는거야. 한번 생각해봐. 어떤 사회가 있는데, 도덕의 기준이 반말하는 사회다? 그런데 그 사회의 사람들이 “우리의 도덕기준은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주장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어떻겠어? 뭐 저런 븅신 개소리가 다 있냐 하겠지? 왜냐하면 우리는 존대말이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자 그럼 질문. 저 사회의 사람들은 절대주의를 갖고서 생각하고 있다. 그럼, 쟤들보고 개소리라고 하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걸까?

여기에 대고 ‘상대주의 아니냐?’라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너희들은 스스로가 이분법적 사유구조에 젖어 있음을 증명하는 거야. 왜냐하면 절대 아니면 상대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 이건 선과 악, 옳음과 그름, 보수와 진보(이건 좌좀들에게 심함) 등에도 마찬가지로 들어와 있어. 그리고 이런 이분법적인 사유구조는 인류의 보편적인 사유구조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난 지적하고 싶은 거다. 이것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인지하지 못하는 서양문화 중 하나거든.

뭐 일단 여기까지 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사실은 서양에서 들어온 특수한 문화라는 점을 짚어보았다. 그럼 이제 동양문화를 비판하는 입장들의 오류들을 한번 살펴보자.



 2. 동양비판에 숨은 서구편향적 잣대


 (1) 논점선취의 오류: "너 요즘도 마누라 때리냐?"

너네가 길을 가는데 대뜸 누가 이렇게 물었다: “야 게이야! 너 요즘도 마누라 때리냐?”



우리 착한 게이들은 이 물음을 들으면 말문이 막힐 거야. 왜냐하면 게이들에게는 마누라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때리지 않기 때문이지. 즉 질문자는 일게이와 아무 상관 없는 마누라 삼일한을 은근슬쩍 전제로 깔고 있는 거야. 이건 명백한 오류지. 자 여기까진 다들 이해하지?

그런데 서양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들 중 적지않은 사람들도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거야. 대표적으로, 아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데 막스베버였나? 여하튼 “동양에는 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 학자가 있었어. 그러니까 이 학자는 주로 하는 얘기가, 너희 동양애들은 왜 우리 서구와 같이 훌륭한 자본주의 체제와 성숙한 민주체제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고 모양 고 꼴로 살아왔느냐 라는 말이야.

그런데 이 질문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너 요즘도 마누라 때리냐?”라는 질문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어. 왜냐하면 그 질문은 서구식 체제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전제를 깔고 들어가기 때문이지. 

위에서 이야기했던 평등주의를 대입해 보자. “왜 당신들은 우리들과 같이 훌륭한 페미니즘을 이루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뭐라고 대답하고 싶어? “이 병신년들아 너희 페미니즘을 우리가 왜 이루어야 하는데?”라고 머가리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지?

마찬가지의 오류를 우리가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물론 이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은 항변하지. “아니 씨발 자본주의는 인류가 겪어 온 검증된 우수한 체제인데 그게 왜 오류인데?”라고 나한테 외치고 싶을거야. 하지만 그건 인류가 자연적으로 진화되면서 겪어온 것이 아니고 서구제국주의가 침투하면서 부자들의 무한 이익추구에 기원하는 이념이야. 그러니까 그게 검증된 우수한 체제라서 인류가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긴 시간동안 강제로 그 체제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버려서 지금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단 말이지.


 (2)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

위에서 얘기한 거랑 별로 다를 거 없는데, 이건 논의에 사용되는 개념의 정의를 은근슬쩍 자기 의도에 맞게 해석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해. 가령 “우수”라는 낱말을 누가 이렇게 썼다고 해보자:

“예의를 아는 사람이 예의를 모르는 자보다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동양사람들은 존대말을 하는데 서양새끼들은 반말밖에 모르는 족속들이므로 동양이 더 우수하다.”

이건 아무리 동양뽕 맞은 사람이라도 개소리라고 생각할거야. 왜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수하다”는 말의 뜻을 은근슬쩍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해서 쓰기 때문이야. 원래 우수하다는 말은 객관적인 잣대를 통해 양측을 비교해서 더 측정결과가 높은 쪽에 쓰는 말이지. 그런데 저 문장에서는 존대말을 할 줄 안다는 것으로 은근슬쩍 바꿔 쓰고 있어.



그런데 이와 같은 오류를 서양뽕 맞은 애들이 동양 비판할때도 쓰는 경우가 많이 있다. 뭐 결국 논점선취의 오류랑 별반 다를 것은 없지만, 이건 좀더 미세한 부분으로 파고들어서 분석한 거야. 자세한 건 뒤에 나올 논의들을 보면 보충이 될테니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 오류의 예로는 "과학"이라는 말의 범위를 자기 멋대로 사용하는 케이스가 있지. 일베 똥송인들 중에 그런 애들 많이 보이더라.


 (3) 무지에 기인한 맹목적 광신

제목을 너무 거칠게 달았나? 말 그대로 무지에 기인한 맹목적 믿음이야. 무슨 소린고 하니, 서양은 잘 아는데 동양은 피상적으로만 잘못 알거나 모르는 경우, 자기가 잘 아는 서양을 잣대 삼아서 이거랑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다 열등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케이스지. 게이들 중에는 서양의 잣대가 곧 현대문명의 잣대라고 생각해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잣대라고 생각하는 애들이 있는 모양이던데, 현대문명이라는 그 자체가 현재 지나치게 서구화되어있다는 반성이 식자층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 언급해 둘게. 이 역시 다음 챕터에서 또 다루어지니까 일단 패스. 일단 서구편향적 잣대의 유형만 간단하게 소개한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서양뽕이나 동양뽕 맞은 애들은 자기 자신을 한번 반성해 보는 계기로 삼아봤으면 해.





III. 일베간 링크글에 대한 응답

야 씨발 드디어 본론을 들어왔네. 그래도 우리 일상생활과 서구문명과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좀 드러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글이 길어졌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근대화된 이후에 동양은 많이 서구화되었어. 기술만 들어온 게 아니라 이념들이 같이 들어왔거든. 그리고 그게 부정적으로만 보거나 긍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야. 위의 글을 충실히 따라온 게이들이라면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가 수입해 온 문물들의 장단점을 스스로 판별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럼 이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어제 일베간 그 글(https://www.ilbe.com/4340284287)에 대한 나의 응답을 시작하도록 하지.



 1. 화성음악과 단선음악



 (1) 링크글의 입장 요약

소리에 대한 취향은 다를 수 있으나, 작곡이라는 전문영역에서 보면 서양음악은 화음이 사용되지만 동양음악은 단조음악이라서 반주개념도 없고 웅장하지도 않고 시끄럽다. 음악만 봐도 서양은 분석적인데 동양은 평면적이다. 단성음악은 고인돌 시대에도 불렀을 법한 단순한 원시음악이며 동양 음악은 소음만 만들어낸 거다. 그리고 오늘날 국악하는 사람들도 화성으로 작곡해서 음반 낸다. 즉 단성만의 고유한 매력이 있어서 화성을 안했을것 같으면 이렇게 화성만 살아남는 현상은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단성음악은 열등하다.


 (2) 나의 응답

내가 왜 III챕터를 시작하기 전에 II챕터를 길게 썼는지 아냐? 서양문화를 구별해서 인식할 줄 알아야 지금 내 말을 알아듣기가 쉽기 때문이야. 서양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실체론적 문화라고 했다. 이러한 문화권에서는 영원불변한 관념적인 질서가 진리의 대상이 된다고 언급한 것 기억나지?

그래서 이런 데에서는 소리예술의 발생에 있어서도, 음의 변화적 요소가 아닌 불변적 요소에 치중하게 돼. 음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피치, 듀레이션, 볼륨, 톤이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음정, 길이, 크기, 색깔이다. 이 중 불변적 요소가 뭐겠냐? 당연히 높낮이에 대해 절대값을 가지는 음정이지. 그래서 실체론적 문화권에서는 음악의 발달이 음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된 거야.

음악만 영향이 있겠어? 춤도 마찬가지. 영원불변하다고 믿어지는 게 땅이겠냐 하늘이겠냐, 하늘이겠지? 그래서 서양의 춤은 대체적으로 땅의 잡아당김으로부터 해방되는 몸짓이야.

그럼 동양문화권의 음악은 어떨까? 동양문화권은 서양과 반대로, 불변하는 것이 아닌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라고 보았어. 세상에 두 눈 뜨고 보이는 것 중에 안 변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지. 이쪽 사람들은 관념을 추구하지 않고 현실에 집중했어. 오늘날 서양철학이 고대의 이성주의에서 현대의 실용주의로 흘러온 것과 달리, 동양은 처음부터 시작이 현실주의였던 거야. 그건 기후 풍토와도 연관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까지는 설명하지 않을게.



하여튼 중요한 건 동양 사람들은 변화를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고. 그럼 음악에서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불변의 음정 쌓기에 관심이 있겠냐 없겠냐? 없지. 대신에 어디에 관심이 있을까? 음의 톤이나 볼륨에 치우쳐진 거야. 그러니까 동양인들이 음의 요소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양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음의 색깔이야. 이건 현실적이라는 의미가 있어. 왜냐하면 고대의 실제 삶에서는 소리의 구성요소 중 음색이 가장 긴요했거든. 그러니까 동양의 합주는 똑같은 멜로디를 각기 다른 톤으로 연주하는 모노포니의 단선율구조가 발전한 거야.

이 전통의 흔적이 요즘 판소리 명인들이 말하는 “성음”이라는 개념이지. 성음은 음을 듣는다는 거야. 그런데 서양음악의 성음은 음의 음정을 캐치하는 음감을 말하는 반면, 동양음악의 성음은 음의 색깔을 캐치해서 음악인의 경지를 가르는 기준이 돼. 그러니까 화성음악과 단성음악으로 우열을 가를 수가 없다는 말이야. 애초에 범주 자체가 달라서 비교할 대상이 되지를 않는다고.



그럼 왜 오늘날 단성음악은 사라지고 화성음악만 남았을까? 화성이 우수해서? 아니 그게 아니지. 근대화된 이후로 전 세계가 반강제로 서양화되었고 서구 문물이 들어왔는데 당연히 서양음악이 쏟아져 들어오지 않겠냐. 생활양식 자체가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뀌어서 의복이 점점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뀌어 간 것 처럼, 대중음악 역시 서구문물이 유입되었으니 서양음악이 주류를 이루었고, 전통은 소외되어 갔잖아. 게다가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라는 36년간의 문화적 공백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라도 남아있는게 용한 거야. 그리고 단성과 화성이 사실 음악에선 분리되질 않아. 강조된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이면, 이건 너무 상식적인 건데, 요즘 새로운 기술이 들어오면 옛날 물건에 적용해서 개선하고 하는 짓 많이 하지 않냐? 그게 음악에도 당연히 일어나는게 정상이지. 전통음악에 서양음악 요소가 결합되는 건 당연한 거야. 왜냐하면 옛날에 없던 게 들어왔으니까. 거꾸로 서양음악에 아프리카나 중국이나 한국 음악이 들어가는 케이스도 있는데 이쪽 케이스는 뭐라고 설명할래? 예술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거 있으면 편견없이 받아들일 뿐이야.



 2. 서양문자와 동양문자


 (1) 링크글의 입장 요약

한글이 우수하다고들 하는데 서구 언어학자들의 논문에 별 극찬이나 놀라움은 안 나온다. 서양에서는 수천년 전에 음소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종도 중국 음운학의 영향을 받아서 창제한 것이고, 이 중국의 음운학 또한 서양 알파벳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서양의 알파벳에 대한 지식이 중동, 몽골, 중국을 거쳐 조선에 유입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글의 존재는 동양이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증거가 된다. 서양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만들었어도 어쨌든 서양보다 늦었으니까. 서양이 수천년 전 특유의 분석력으로 소리를 모음과 자음이라는 음소레벨까지 분리해낸 데 비해 동양은 내세울 게 없으며, 한자 또한 미학적인 부분에서야 좀 볼만할 뿐이다. 문자의 기본 목적은 미술이 아니다.




 (2) 나의 응답

저 게이가 무슨 논문을 본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내가 아는 지식의 범위내에서는 저거 문명이동설이라고 해서 제국주의의 소산으로 한참 유행이 지난 뒤떨어진 이론으로 알고 있다. 요즘에는 문명이 각 발생지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여 인접지역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호보완해 갔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내가 자세한 팩트를 조사할 여력이 지금 안돼서 유감이다.

(잠깐 딴소리 하나. 혹시 문자뿐 아닌 언어 자체로 봐서 동양언어가 서양언어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족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지. 인도유러피안 언어와 동북아시아 언어는 전혀 달라. 언어는 사유를 결정하거든. 우리가 단순하게 하는 생각 말고, 깊게 생각하는 ‘사유’의 수준으로 오면 언어가 떨어지지 않을 수 없고, 언어의 구조에 의해서 우리의 사유틀이 영향을 받게 된다고. 그래서 인도유러피안적 언어에서는 실체론적인 경향이 강한데 동방언어에서는 생성론적 경향이 짙었던 거야. 물론 동양과 서양의 언어가 간접적으로든 어떻게든 상호간의 교류가 아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리고 저 글쓴게이는 서양과 동양이라는 낱말을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를 통해 갑자기 조선과 어디 페니키아같은 데로 한정지어서 대비시켰다가 또 어느새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궁금한 게이들은 링크글 원문 봐봐라.

또, 서양이 옛날부터 음소단위까지 글자를 만들었는데 동양은 없다고 했지. 그건 저 글쓴이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한자 가지고 정말 그림만 그렸다고 생각하냐? 음소단위까지 변별하는 방법 있다. 쉽게 예를 들면 “ilbe”라는 음 중 앞부분의 “il”을 표기하고 싶다 이거야. 그러면 “忍一反”이라고 하든가 해서 “i[이-]”와 “l[-일]”의 음소를 나누어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뭐라고 하는지는 내가 지금 기억이 안난다. 미안하다 지금 기억에 의존해서만 쓸 수 있어서 팩트까지 첨부를 못한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언어가 우월하다는 기준에 왜 음소변별 표음 능력이 들어가야 하냐? 뭐, 언어가 미술이 아니고 실제로 발음하고 쓰는 거라고? 당연히 실제로 쓰는 거지. 근데 언어가 발명되던 고대시대에 문자를 향유하던 층이 누구였는데? 실제로 쓰는 대다수의 계층이었던가? 아닌데. 책을 남기고(파피루스든 죽간이든) 읽을 수 있는 상위층이잖아. 그럼 오히려 책 쓰기에 종이 낭비가 심하지 않도록 문자를 일렬로 늘려쓰지 않고 박스꼴 안에 담아서 쓰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알파벳이 아래 아니냐?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자면 말이지. 물론 알파벳이 열등하다는 말이 아니야. 내 말은 우월과 열등의 기준을 이미 알파벳언어에 유리하게 설정해 놓고 비알파벳 언어를 거기에 꿰맞추는 오류를 지적하는 거지. 그렇게 치면 비알파벳 언어에 유리한 잣대를 설정해서 알파벳을 꿰맞춰도 되게?

아 한가지 참 빼먹을 뻔했다. 중국말과 한국말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야. 세종이 당연히 중국 음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한국말과 중국말과 일본말이 예전에는 하나의 언어였던 게 분화된 것이 많거든. 일본어는 기억이 안나지만 한국말 중에도 왜 “바람”이나 “가람”같은 순우리말 있지, 그거 중국 상고음 복성모체계가 고대에 분화되어서 떨어져 나온 거야. “PARAM”이 한국에서는 “바람”이 됐고 중국에서는 “풍(feng)”이 됐어. 그러니까 영향을 받았다는게 당연히 정상이란 말임.



 3.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1) 링크글의 입장 요약

동양철학자들은 현실의 관계에만 관심을 가졌고 철학도 착하게 살라는 얘기밖에 없다. 반면에 서양철학은 존재론이 주를 이루고 항상 그것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서양철학은 항상 골치가 아프고 까다롭다. 가령 서양의 원소론은 오늘날 화학과 같은 논리인데 반해 동양의 오행론은 물질의 구성요소가 아닌 성질의 근원이라 중국인의 관점에서만 관계가 정해져 있고 보편적이지 않다. 서양의 경우는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믿지 않고 논리를 중시했으며 동양에서 발전 못한 형식논리학이 발전했다. 동양은 이성과 감성을 구분하지 못했고 논리상 흠이 없어도 사람 기분나쁘게 하면 틀린 것으로 간주했다. 때문에 동양은 관계를 중시하므로 세상을 보는 폭은 넓을수밖에 없어 기술분야에선 서양과 대등하거나 일부 앞서기도 했으나, 깊이가 없기에 분석력과 논리력이 필요한 과학, 창조분야에선 서양을 앞선 적이 없다. 


 (2) 나의 응답

어디서 찾은 자료인지 모르겠는데 이거 철학하는 사람이 보면 정말 웃는다. “본질”이라는 말이 뭔지 아는가? 라틴어 엣센티아에서 온 말로 오늘날 엣센스라고 하는게 본질이야. 그런데 본질에는 “본”과 “질”이 결합돼 있어. 그러니까 서양철학은 本질이 있으니 반드시 末질도 함께 생각했다는 얘기야. 쉽게 말해서 눈에 안보이는 게 본질이고 눈에 보이는 게 말질임. 근데 본질이란게 과연 사물에 존재하는가 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생각을 했던 게 2500년 전 짱깨들이다.



그러니까, 뒤집어 생각하면, 서양애들은 존재에 본질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걸 추구했는데, 동양애들은 존재에 본질이란게 정말 있는가 하는, 즉 서양애들이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 전제부터 쑤시고 들어갔다고. (물론 동양철학 언어로는 이렇게 표현하면 안되지만 지금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글이라 이렇게 쓴 거다. 철학게이들 있으면 양해해라.)

동양철학이 관계론이라.. 보니까 관계론이라는 말을 현실세계의 관계를 말하는 모양인데, 틀렸다. 현실세계는 인간이라는 동물 종의 눈으로 본 세계라는 점을 인정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던 사상이 공자 이전의 시대부터 있었다. 그게 도가사상의 원류이다. 도가사상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한가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틀린 이해이다.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도가사상은 문명철학이다. 정확히는 문명을 초월하는 사상이지 문명에 반하는 사상이 아니다. 요즘 세상이 서구화되어서 대중들에게 정확한 도가사상의 모습이 알려지지 않은 거야. 하여간 동양엔 도덕밖에 없고 서양에 철학다운 철학만 있었다는 얘기는 이정도만 해도 논파가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하나만 더 말해두지. 서양철학이 이데아니 본질이니 싸우다가 현대로 오면서 겨우 생성론에 근접하고(화이트헤드, 듀이 등) 현실주의에 눈을 떴을 때, 그 서양학자들이 자기들의 난점의 대안으로서 발견한 것이 바로 동양에서 2500년 전에 대나무 죽간에 글을 남겨놨던 도가사상이다. 물론 도가사상과 비슷한 사상이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도 있기는 했어. 그런데 노장사상은 존재 자체를 해체시켜 버리는데 서양철학은 이런 관점까지 도달하진 못했지. 그리고 오쇼 라즈니쉬가 꼽은 인류 최고의 지혜가 장자이며 이 선사상의 깨달음은 부처의 깨달음이나 예수의 깨달음과 유사하다. 그리고 하바드대학에 달라이라마.. 아 됐다 일단 여기까지만.

물론 서양철학이 열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서양철학이 간과하고 있던 점을 동양철학에서 보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동양철학에 모자란 점은 서양에서 배워야 한다. 특히 서구의 논리학은 평면논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일단 인간의 사유구조를 정교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어서 오늘날 합리주의적인 삶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동양학 하는 사람들은 좆빠지게 서양을 배우려고 노력하는데, 서양학문에 빠진 사람들은 동양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양학자들은 동양과 서양을 전부 다 알지만, 서양학만 하는 이들은 서양만 알게 되어 버렸다. 앞으로 우리같은 젊은세대들은 이런 폐단에 빠지지 말고 가슴을 트고 폭넓게 공부하며 살아야 한다.



 4. 분석적 과학과 기술


 (1) 링크글의 입장 요약

영국의 베이컨이 3대 발명품으로 지정한 것은 황색화약, 나침반, 종이이다. 중국이 발명했다는 화약은 흑색화약으로, 그 혼합비율도 알려진 바 없는 그냥 경험적인 산물에 불과하지만, 황색화약은 화합비율이 명확히 밝혀진 과학의 산물이다. 체득적인 발명에 과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덮어씌우지 말아라.


 (2) 나의 응답

일단 링크글의 글쓴이는 “과학”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역시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과학”은 반드시 “서양식 화학기술법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근데 왜 서양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산물만이 과학이 되어야 하나? 중국 화약이 ‘과학’이 아니라는 근거로 혼합비율을 드는데, 그 혼합비율 계산법은 서구 사람들이 쓴 방식이지 중국 사람들이 문명을 영위할 때 쓴 방식이 아니다.



내 말을 알아들을지 모르겠는데, 오늘날 과학으로도 아직 다 온전하게 설명해내지 못한 과거의 유산들 있지, 그게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경험은 과학이 아니라고? 니가 예로 들은 영국의 베이컨 그 사람이 바로 서양에서 “경험론”이라는 근대의 양대포문 중 하나를 연 사람이다. 경험이야말로 학문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이 바로 니가 언급한 그 베이컨이라고. 동양 과학을 부정하려다 보니 동양과학의 원천인 경험까지 부정해야 했던 모양인데, 과학은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결론에 두드려 맞추려고 하면 그런 오류를 범하기 쉬우니 다음부터는 주의하길 바란다.

물론 그 글쓴게이가 무슨 말 하고싶은지는 안다. 뭔가 있어보이는 원리에 기반해서 설계도 그려가면서 혹은 실험해가면서 연구하는 그런 근대과학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지. 그리고 그런 근대과학은 정직하게 얘기해서 서양이 동양보다 월등하게 앞서 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고대부터 기하학에 대한 탐구를 진행시켜 왔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성과들이 축적되어 산업혁명을 낳았고 이후 동양을 집어삼킨 제국주의의 근본동력이 된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다. 내가 말하고 싶은것은, 동양에도 과학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의 자연과학에 비하면 그 효율성이 낮았다고 정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걸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면 우리는 진보주의라는 놈을 한번 끌고 들어와야 한다. 우리가 보통 진보하는 것은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거 정말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생각이다. 물론 진보하면 좋지. 그런데 우리가 좀 거시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진보는 왜 하는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진보 왜 하냐? 당연히 좀더 편하게 살려고 하지. 근데 왜 더 편하게 살려고 하냐? 더 행복하게 살려고 그러지. 그럼 다시 묻자. 진보가 정말 참된 행복을 가져오나? 즉 편리함이 무조건 행복을 더 가져오는가?

우리는 일상적인 이런 상식도 한번씩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는 거야. 지금은 카톡의 세상이 되어놔서 단체톡이라도 있으면 핸드폰에서 벗어날 자유가 상실되어 있는 현대인데 과연 스마트폰의 진보가 인간의 진짜 행복을 실현해주었을까? 너네 폴더폰 쓰던 시절이 더 행복하다는 생각 한번이라도 해본 적 없냐? 스마트폰 그것이 혹시 속박이지는 않을까?



물론 여기에 대한 너희의 대답도 예상하고 있다. 그럴거면 원시인이나 되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극단을 취하지 않는다. 살 만큼 진보했으면 이제 진짜 행복을 위한 길로 시선을 돌려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 이것이 동양의 기본관점이다. 장자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노인이 힘겹게 농사를 짓길래 공자의 제자가 지나가면서 최신기계를 쓰라고 소개를 해 주었지. 근데 그 노인이 되려 공자제자를 꾸짖는 거야. 자기가 그 기계를 몰라서 못쓰는게 아니고 일부러 안쓰는 거라고. 기계를 한번 사용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기계의 편리함에 젖어 나태해질까봐 자기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기계를 일부러 안 쓴다고..

물론 이 설화는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고 또 메시지 전달을 위해 다소 극단화된 감이 있다. 하지만 이 설화는 동양사람들이 왜 문명을 서양처럼 그렇게 진보시키지 않았는가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동양사람들은 조금 몸을 더 움직이더라도 건강하게 근심없이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한 거야. 그리고 여기서 만족할 줄 아는게 어쩌면 좋은 면도 있을 수 있어. 편리함과 쾌락을 무한정 추구하다 보면 더 이상 편리함이나 쾌락을 추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므로 그전에 절제하라는 건 서양에서도 나온 바 있는 지혜였거든. 별로 유행하진 못했지만.

아래 짤을 봐. 진보주의의 폐단을 응용한 사진작품이라고 난 본다. 만족 못하는 김치ㄴ.. 아니 양년.



하여튼 동양사람들이 자연과학이나 기타 문명을 서양처럼 진보시키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도 있었다는 점을 난 지적하고 싶은 거야. 물론 기하학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면은 동양이 부족한 점이고. 또 그렇게 깊은 통찰로 인한 선택이 조선말기 쯤으로 내려오면 거의 껍데기만 남다시피 해서, 정신상태가 개판이 되고 또 서양의 막강한 힘에 매력을 느껴 결국 굴복하게 된 것은 너희들도 잘 아는 바와 같다.

다만 나는 동서양이 본격적으로 만나기 이전의 시기를 보면 동양인들이 진보를 의도적으로 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짚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양인들이 힘을 앞세워 무력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 대책이 없었다는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건 본질적으로는 서양인들이 잘못한 거야. 만족할 줄 모르고 쳐들어와서 무한하게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것은 매우 열악한 정신상태였음을 말해 주거든. 행복의 가장 손쉬운 달성을 위해서는 욕구의 총량을 줄이면 돼. 그러면 쉽게 만족할 수 있거든. 결국 만족하면 행복할 거 아니냐. 근데 과학의 진보에 한번 맛들인 애들이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배기지 못하고 결국 제국주의를 초래했고, 이것은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는 우매한 인간을 양산하게 된 거지.



 5. 동양철학에 대한 오해


 (1) 링크글의 입장 요약

중국인들은 인도에 대해서도 열등감을 가진 흔적이 발견된다. 송대에 성리학이 그 증거다. 물론 거기에도 논리나 분석력은 종범이고 뜬구름 잡기로 끝났다. … 유교적 합리주의는 도덕에 합치하는 이성만 인정해 불쾌한 진실은 받아들이지 않고 너무나 현실성과 실용성에만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교에 빠진 동양인들은 실생활에 쓸모없는 지식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그 실용적인 성격으로 인해 속물적 욕구마저 합리화시켰다. 진리 그 자체를 중시한 고대 그리스와 달리 유교는 학문의 목적이 입신양명하여 효도하는 것이었다. … 도가는 어떤 논쟁이나 탐구도 때려치고 집착하지 말라는 사상이다. 끝없는 검증과 연구를 거듭하는 과학과는 상극관계에 있는 사상으로 갑부들이 시골에 쳐박혀 여생을 살 때나 좋은 사상이다.


 (2) 나의 응답

송명성리학은 불교에 대한 반발에서 생긴 거다. 열등감이 아니고. 아니 정확히는 송대 성리학이 불교가 그 당시에 출가를 한다든가 해서 너무 사회를 망가뜨리니까 이놈의 폐단을 없애자고 배불론(불교 배척)을 편 거야. 불교에 맞서기 위해 우주론이 필요해서 고대의 중용사상을 끌어오기도 했지만. 그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는 무슨, 그 사상을 모르니까 나오는 소리지 아는 사람들은 명쾌하게 안다.

나머지 부분들은 뭐 내가 위에서 충분히 설파한 내용을 쫓아온 사람들이라면 알아서 읽고 넘길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제 슬슬 귀찮아진다. 뭐 유교가 입신양명이라고.. 유학 경전들 어디에도 입신양명해서 출세하라고 가르친 적 없어. 입신양명은 인간이 가진 명예욕에 기인한 것이지 유교의 사상이 아니야. 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효는 원래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충심이 아니고, 부모가 자식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까지 효에 포함되는 거야. 그런데 그게 지배권력의 야욕과 결탁하면서 점차 충심 강조로 변질되어간 것이지. 이렇게 사상이 지배권력과 결탁해서 변질된 것은 동서가 마찬가지임. 고중세 기독교가 대표적이겠네.

 

 6. 기하학(수학)과 증명



 (1) 링크글의 입장 요약

비서양 국가들의 수학은 전부 대수학 영역에 치우쳐져 있다. 실생활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양에는 기하학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니 대수학에서만 해도 동아시아는 서양과 달리 증명이라는 것이 없었다. 증명은 수학에서 논리성과 무결점성을 입증하므로 중요하다. 그래서 동양은 열등하다.

 (2) 나의 응답

점점 반복되는 논리 때문에 아마 읽는사람들도 지금쯤 지쳤을 거다. 논점선취의 오류 여전히 범하고 있는거 보이지?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발전하게 된 특수분야를 잣대로 삼아서 타 지역을 재단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그걸 잣대로 삼은 이상 수학면에서 동양이 떨어진다는 결론이 당연히 나오지. 그리고 동양은 이 수학을 정직하게 기초부터 배워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수학은 요즘 세상에서는 논리력의 기초가 되거든.




IV. 동양과 서양을 대하는 자세 제언

결론 낸다. 서양의 잣대로 동양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잣대이다. 동양은 서양의 논리로 이해하기 힘든 자체의 별도의 논리가 있어서 그걸 알아야 양자의 비교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각각의 논리에서 비추어 보면 별로 우월하거나 열등하다 할 것이 없으며, 시대적 배경에 의해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단 한가지 자연과학의 진보를 이루어 막강한 파워를 갖추게 된 것은 서양의 능력이 우세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삶의 궁극 목적일 행복과는 오히려 반비례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를 예견한 동양인들은 의도적으로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다.(근거는 본문에)




V. 길어서 똥송한 세줄요약 마무리

1) 서양이 분명 과학처럼 동양보다 앞선 영역 있다. 그런데 그 역시 조명하는 관점이 달라지면 오히려 생각이 뒤진 것일 수도 있다.(진보주의 참조)
2) 어떤 분야의 발전이란 것은 시대적 지역적 특수성에 의한 것으로 우열과 무관하다.
3) 비교질을 하려면 한쪽 잣대로 다른쪽 보는 우를 범하지 말고, 양쪽을 객관적으로 알려는 발상의 전환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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