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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고려 vs 거란

과정 2017. 10. 26. 14:34

----전시체제----

 

  

 

 

 거란세력도1.jpg

<당시 국제정세>

 

 

 

1018년 10월 
소배압이 보낸 선전포고문이 고려에 도착했어.  
고려조정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긴장했지.

 

게다가 상대는 소배압. 
8년전 양규의 곽주성탈환으로 
운지직전에 처해있던 와중에도 
개경진공이라는 파격적인 돌파구를 제안해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었던 그 장수였어.

 

  

 

  

소배압의 선전포고문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강감찬을 서북면 최고 책임자로 
파견해 놓았던 현종은 곧바로 국정을 
전시체제로 전환해 70세의 강감찬을 상원수, 
55세의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해 대항군을 조직했어.

 

병력은 총 20만 8천명,

 

그야말로 김치년 가슴 모으듯

영혼까지 끌어모은 병력이었지.


6부에서 약술했듯 이번에 거란을 막아내지 못하면

고려는 정말 끝장이었고 거란 역시 지지부진했던

8년간의 전쟁을 이제 그만 어떤 식으로든 끝내야 했기

때문에 이 번 제3차 고려 vs 거란 전쟁이 사실상

 '최후의 승부'라는 걸 양측 모두 직감했어.

두 진영의 긴장은 최고조를 향하고 있었지.

 

 

 

"근데 강감찬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이 위급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강민첨이

넘버투라니 노무 노무 파격적인 승진 아닌가?

지난 제2차 고려 vs 거란 전쟁에서 조원과 함께

평양성을 사수해 낸 공로는 있지만 그렇다해도

이런 국가 비상사태에서 곧바로 넘버투를 주는 건

좀 아니지 않노?"     

라며 의아해하는 게이들도 있을거야.

 

 

 

 

사실 강민첨은 서경공방전 후에도

고려를 또 한 번 위기에서 구해낸 적이 있었어.

 

 

 

 

 

 

여진족 침략이었지.

 

  

 

 

 

 

 

 

---강민첨---

 

 

 


 

 <여진족>

 

 

 

 

 

여진족은 제2차 고려 vs 거란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고려로 쳐들어오기 시작했어.

다행히 당시 여진족은 하나로 규합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침략당한 곳이 고려의 최후방이었다는 거였지.

 

 

여진족들은 2백척이 넘는 배를 타고 경주에 쳐들어온 걸

시작으로 포항지역은 물론 울릉도까지 쳐들어가

섬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가버릴 정도였어.


당시 고려가 가용병력을 모조리 강동6주에

투입하고 있는 탓에 경상도로 보낼 병력자체가

없다는 걸 간파했던 거지.  

 


전라도와 경상도,충청도는 고려의 든든한 후방기지로서 
초토화 된 강동6주와 황해도를 대신해 병력과 자원을

공급해줘야 했기 때문에 경상도의 안전은 곧

대 거란전쟁 수행능력과 직결되는 문제였어.


만약 이대로 고려중앙정부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면

경상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지방세력가들도

고려정부를 불신할 것이고 자기지역과 재산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할 것이기 때문에 국력을 결집시킬 수 없게 될 것이었지.

 

 

 

허나 당장 그쪽으로 보낼 토벌대를 구성할

여분의 병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유일한
해결책은 누군가 홀로 내려가 지역유지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사병들을 모아 여진족을 물리치는 거였어;;

 

근데 말이 쉽지 고려에 대한 소속감도 종범인 
그들이 이제껏 본 적도 없는 중앙 관리의 명령에

순순히 자신들의 병력을 내어줄 리도 만무한데다,

설사 모았다고 해도 규율도 없고 훈련도 되어있지 않은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여진족을 물리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공가능성이 극히 희박했지.

 

 

 

이런 임파시블한 미션에 나섰다간 괜히

커리어만 깎이고 최악의 경우 패전의 책임으로

죽거나 삭탈관직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신들은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어.
당시 쓸만한 인재들은 모조리 최전선에 파견되어

있던탓에 고려 중앙조정엔 이렇게 황보유의 같은

병신들만 우글댔지.(6부참조)

 

 

 

 고려조정.jpg

<아무도 없노 이기야>

 

 

  


결국 홀로 노심초사하던 현종이 마침내

선택한 사내가 바로 '강민첨'이었어.

 

그가 평양성에서 보여줬던 담력과 배포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 거야. 
마침 그의 고향도 경남 진주였고.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강민첨은 현종의 기대에

멋지게 부응해 특유의 카리스마로 지방 세력가들을

순식간에 단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침략해 온

여진족들을 모조리 격퇴하는 데에도 성공했지.

  

자칫 지방의 중앙정부 불신이 도미노현상을

일으킬 뻔 했던 이 엄청난 위기를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한거야;;; 갓민첨 ㅍㅌ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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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때 강민첨이란 사내의 진가를 알게 된

현종이었기에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강민첨을 선택해 강감찬 & 강민첨 조합을 꾸렸던 거지.

 


즉 현재 현종이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라인업이었던 거야.

 

 

 

 

 

 강민첨.jpg

 

 

<또 하나의 숨은 영웅 강민첨>

 

 

 

 

 

 

 

 

 

 

 

---강감찬---

 

 


백발을 흩날리며 서북면으로 진군하던

70세의 노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어.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았지.

 

 


소배압은 왜 새삼스럽게 '선전포고'를 한 것일까?
지난 8년간 이루어졌던 세 차례의 대규모 침공에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실제로 지금처럼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는

미리 선전포고를 해야한다'는 국제협약도 없던

시절에 당시의 침략국들이 그저 좆중딩 허세甲으로

선전포고를 해댄 건 아니었어.


선전포고란 본래 적 진영에 내분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보내는 거였지. 언제나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은 있기 마련이니까.

 

 


허나 993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5년동안이나

전쟁중이었던 고려에게 새삼스럽게 선전포고를

보낸다고 해서 이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웠어.


오히려 고려가 강동6주의 방비를 강화할 시간만

벌어주는 꼴이었지.

 

  

 


그런데도 소배압은 어째서 선전포고문을 보낸 것일까?

 

 


왜?

 

 
 
강감찬은 이 의혹속에 이 번 대전의 명운이

달려있다는 걸 직감했어.

뭔가 불길했지.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쟁이 벌어질 지 몰랐어.

 

 

 

 

 

 

 

 강감찬.png  

 <당시 70세의 노구였던 강감찬>

 

 

 

 

 

 

 

 

 

 

---전략戰略---

 

  

강감찬의 직감은 정확했어.

 

소배압의 목적은 따로 있었지.

 


소배압은 지난 8년간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강동6주의 지형과 방어시스템을 훤히

꿰뚫고 있었어.

 


서희가 생명을 깎아가며 구축한 이래

수많은 고려군의 희생으로 완성된

강동6주의 방어시스템이란 길목마다 배치된

여섯 개의 성을 포함한 최소 30여 곳 이상의

요새들과 기동타격대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해 침공해 온 거란군을 사방에서

요격 & 격멸하는 체제였지.

 

 

 


그리고 지금까지 거란군은 이런 애미리스한

방어체제에 휘둘려 눈 앞의 강동6주를 힘으로

하나하나 돌파하는 데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신들의 장점이자 강점을 발휘하지 못해 결국

전장의 주도권을 빼앗겨 왔다는 게 소배압의 결론이었어.

 

 

소배압은 전장의 주도권을 되찾아 오기로 결심했지.

 

 

 

 

개경직공

 

 

 

 

농경민족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유목민족의

강인한 환경적응력과 기동력, 돌파력, 현지조달력을

이용해 강동6주 전체를 우회해 버리기로 한 거야.

선전포고는 바로 그를 위한 포석이었던 거지.

 

소배압 본인이 직접 쳐들어온다는 걸 안 이상 
고려는 지금의 방어시스템을 더욱 강화할 것이고 
가용 병력을 모조리 강동6주에만 집중시킬테니까.

 

 

 

이렇게 고려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파격으로 
이 번 전쟁을 시종일관 거란군이 주도하는 질서 속에서

치르겠다는 것이 소배압의 구상이었고 이를 위해

소배압은 병력도 딱!10만으로 잡았어.


고려군에 비하면 절반도 안되는 병력이었지만

8년전의 경험을 통해 고려라는 지형은 지나치게

많은 병력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작전의 핵심은 '참수전략'이었으니까.

 

대신 이 10만을 초원의 순수 최정예 거란인으로만

구성하기로 했어. 무려 황제의 친위대를 직접 끌고

오기로 한 거지.

 

 

사실 소배압의 '개경직공' 역시 과거 거란의 초대영웅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킬 때 사용한 이래

거란을 단기간에 거대제국으로 만들어 준 오직

거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이었어.

 

즉 소배압은 한마디로 가장 '거란군다운 거란군'으로

승부수를 띄운 거야.

 

  

이처럼 소배압은 평생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내답게 

대범했어. 그리고 탁월했지.

 

  

 

 

 

 

 

 

 

 

 

 

 

 

단지 그의 불행은 상대가 강감찬이었다는 거였어.

 

 

 

 

 

  고려군 진격.jpg

 <소배압의 거란군은 황제의 친위대를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전장의 주도권---

 

 

 
1018년 12월 소배압이 압록강을 건넜어.


제3차 고려vs거란전쟁이 시작된 거지.

 

 

 

이 번에도 역시 흥화진이 문제였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거란군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목안의 가시같은 존재였지.

 

바로 전 해인 1017년 8월에도 거란군은 작정하고

흥화진을 포위해 9일동안이나 공격을 퍼부었지만

결국 흥화진과 고려군 기동타격대의 협공에

허벌나게 치욕받고 돌아가야 했었거든.

 

 

 

 

 

 

 흥화진.jpg

 <양국의 최전방기지였던 내원성과 흥화진(우측의 고진강 주목)>

 

 

 

 

 


소배압은 흥화진도 우회하기로 했어.
다만 흥화진 앞에 슬쩍 모습을 드러내

흥화진 수비대는 물론 고려 전체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어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했지.

 

거란군이 흥화진 앞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가면

고려군은 강동 6주의 각 성과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준비만 할 테니까. 

물론 흥화진수비대가 후방에서 추격해 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소배압은 무시하기로 했어.

 

양규는 이미 죽고 없었으니까.

 

 

 

이렇게 흥화진 수비대와 고려군의 발목을

묶어 놓은 소배압은 감시를 피해 유유히 동쪽으로 이동했어.

그리고 홍화진 동쪽의 '고진강'을 건너기 시작했지.

 

 

 

  

 

 고진강전투0.jpg

 

<고진강 도하>

 

 

 

10만이나 되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는데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어.
아무리 한겨울이라 강이 얼어붙어 있다해도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도하지점은 많지 않으니까.

 

 

그리고 거란군이 한참 강을 건너느라

병력이 분산되어 있을 때,

 

 

갑자기 상류쪽에서부터 거센 물살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어.

 

 

 

 

강감찬이었지.

 

 

 

 

 

 

 

 

---파격 vs 파격---

 

 

 

강감찬은 소배압의 선전포고를 통해 
거란군이 지금까지처럼 강동6주를

힘으로 돌파하지 않을 거라는 걸 꿰뚫어봤어.

 

25년 전에 서희가 소손녕의 항복문서만을 보고

거란에게 전쟁의지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말이야.(1부참조)

 

 

허나 전쟁은 장난이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만을 가지고 전략을

짠다는 건 정말 노무노무 위험천만한 일이지.

만에 하나라도 잘못됐을 때의 리스크는 최소

수십만의 희생이니까;;

이런 이유로 나폴레옹은 전략을 수립하는 걸

'출산의 고통'에 비유할정도였지.

 

 

서희도 그랬겠지만 강감찬 역시 소배압의

진의를 파악해내는 중에 엄청난 고뇌를 겪었을 거야.

'사실은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해도

만약 자신이 틀렸을 경우 당장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20만8천의 고려군은 물론 수많은 고려백성들이

8년 전처럼 거란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될테니까;;

70세의 노인이 감내하기엔 더더욱 큰 고뇌였겠지.

 

 

허나 강감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어.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결과를 알고 있지. 

 

이처럼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고 마침내

그 것을 관철시켜내는 사람만이 진정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는 게 아닌가 싶어.

국민들한테 빵이나 사주라던 어느

병신 쩔뚝이새끼의 비아냥에도 국력을 쏟아부어

한국에 아우토반을 건설한 어느 위대한 남자처럼 말이지.

 

기록이나 역사교과서에는 서희와 강감찬의 이런

고뇌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어서 이 글을 읽는 우리

일게이들만이라도 위인들의 업적 뒤에 숨은 고통에 대해

잠시나마 한번쯤 경의를 표해줬으면해서 이렇게 뜬금없이

주절거렸다ㅎ
 
   

 

아무튼 우선 강감찬은 강조와 달리 지휘부를

강동6주가 아닌 훨씬 후방의 청천강 방어선인

'안주성'에 설치했어.


소배압이 정면돌파를 하지 않을 거라 판단한 이상
후방에서 강동6주 전체를 내려다 보며 대응하기로 한 거지.

 

그리고 흥화진 동쪽의 고진강 상류에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물을 막아놓으라고 지시하는 한 편 도하지점 기슭에 
정예기병 1만2천명을 매복시켜놓았어.

소배압이 고려땅으로 진입하자마자 그를 섬멸해 
초전에 박살을 내기로 했던 거지.

(기병을 육성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인력과 자원이

필요한데다 고려가 지금까지 8년이나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많은 인마를 손실했음을 고려해보면

이 정예기병 1만2천이란 숫자는 고려군의 가용기병중

적지않은 비중이었을 거야. 게다가 강물을 막기 위해

상당량의 소가죽을 징발하고 작업까지 해놓은 걸 보면

그야말로 강감찬은 소배압의 흥화진 우회에 거의 '올인'을 한 거지.

갓감찬 베팅실력 ㅅㅌㅊ?) 

 

 

 

 

 

 

상류에서 갑자기 쏟아져 내려오는 물살에

거란군은 그야말로 패닉상태에 빠졌어.


 

사실 소가죽을 밧줄로 엮어 만든 물막이만으로는

수압을 견뎌내는 데 한계가 있고 한겨울이라 

수량자체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살로

인한 피해는 적었어.

 

기록에도 거란군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내용은 없지.

 

 

 

 고진강전투1.jpg 

 

 

허나 중요한 건 심리상태였어. 
지금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됐다는 건 고려군이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라는 거니까.

게다가 익사하진 않더라도 상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물살에 순간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지.

 

 

 

그리고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고려의 정예기병

1만2천이 맹렬한 기세로 거란군을 덮쳐오기 시작했지.

 

 

 

 

고진강전투2.jpg

 

 <거란군을 살>

 

 

 

 

 

 

 

가장 당황한 건 소배압이었어.

 


어째서 지금 여기에서 고려군이 나타난 거지?

 

어째서?

 

 

왜?

 

 

지난 8년간 고려군이 고수해왔던 방어시스템에
익숙해졌던 건 고려군뿐만이 아니었어.

소배압과 거란군도 마찬가지였던 거야.

 


말 그대로 파격에 이은 파격이었고

거란군은 이 도하작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어.

 

 


1차전은 강감찬의 대승이었지.

 

 

 

 

 

 

 

 

 

 

 

----승부사----

 

 

 

 

고려군의 추격을 피해 거란군을 겨우

수습한 소배압은 선택의 기로에 섰어.

 

흥화진을 동쪽으로 우회해 고진강을

건너려던 걸 고려군이 이미 예측 했다면,

그들은 이 번 작전을 어디까지 간파하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거란군의 진격로가 어디라고 예상하고 있는 걸까?

 

 


도하작전의 실패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소배압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어.

 


과연 그들이 '개경직공'작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사실 애당초 개경직공에 최적화 된 부대편성으로

쳐들어 왔기 때문에 만약 고려군이 개격직공 작전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제 와서 강동6주를 정면돌파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할 수도 없었어.

선전포고를 한 덕분에 고려군이 수비태세를

강화할 시간도 충분했을테니까.

 

 

결국 소배압에겐 여기서 허벌나게 치욕받고 후퇴하느냐

아니면 개경직공계획을 계속 밀어 붙이느냐의 선택사항만

남아있었지.


 

 

그리고 소배압은 개경직공작전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어.

 

 

승부사기질이라면 소배압도 만만치 않았지.

 

 

 

 

 

 

2차전은 소배압의 승리였어.
 


거란군이 강동6주 방어선을 모조리 따돌리고
청천강 방어선마저 몰래 건너는데 성공한 거야

고려의 홈그라운드에서 고려군을 따돌리는

그야말로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 거지;;

 

 

사실 지금처럼 정찰기나 무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감시병이 적군을 발견했다고 해도 그 보고가 
본진에 도착하는 시간, 본진에서 파견한 토벌대가
도달하는 시간, 그리고 이 사이에 적군이 추가로
이동할 예상 거리까지 계산을 해서 토벌대를 파견해야

했기 때문에 지휘관은 보고를 받는 즉시 이 모든 걸

복합적으로 분석해서 작전을 수립해야했어.

 


때문에 바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적의 이동루트와 진격속도였지.


고려군이 무려 청천강 방어선이 무력화 될 때 까지

거란군을 막지 못한 건 소배압이 강동6주 지형을 

철저히 분석해 준비한 이동루트에 더해 유목민족만이

가능한 상식을 벗어난 진격속도로 돌파했기 때문이었던 거야.

 


  

imagesA5KWBEAL.jpg

 

<-소배압은 단순한 용장이 아닌 훌륭한 총사령관이었다>

 

 

 

 

...보고를 받은 강감찬은 사색이 됐어.

거란군이 강동6주 뿐만 아니라 청천강 중류의

고려군 본진 사령부까지 무시하고 그대로 남하한 이상

소배압의 목적은 명확해졌으니까.


강감찬도 설마 소배압이 처음부터 오로지

개경으로 직공해 한 방에 고려 전체를 복속시켜버릴

속셈이었다는 것까진 '상상'하지 못했던 거지.

 

게다가 8년 전 제2차 전쟁때 수도는 물론

황해도일대를 탈탈 털린 후 고려는 아직까지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 여기서 이대로 다시 한 번 수도가 함락된다면 고려는

평생 정회원으로 휠체어만 타고 다녀야할 지도 몰랐어;;

 

전장의 주도권이 거란에게 넘어가려는 순간이었지.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강감찬이 사령부를

고려군 최후방인 청천강 안주성에 뒀다는 거였어.

상황변화에 따라 투입하기 위한 예비대 역시

여기에 있었으니까.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

 


 

 

 

고려군은 곧바로 맹추격에 나섰어.

거란이 여러 부대로 갈라져 남하하고 있는 이상

고려군도 부대를 나눠 거란을 쫓아야 했고
부원수 강민첨까지 나서서 직접 부대를 끌고

소배압 추격에 나섰지.

 

 

 

 

 imagesVA4JXD3K.jpg

 

 

강민첨이 이끄는 추격군이 거란군

한 부대를 따라 잡아 격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소배압은 아랑곳하지 않았어.

 

 

 

거란은 이제 평양성부근까지 내려와 있었지.

 

 


그리고 바로 이 때 조원이 나섰어.

조원은 8년 전 강민첨과 함께

평양성을 사수해낸 영웅이었지.

 


조원은 평양을 지나 남하하던 거란군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고 장소는 우연히도  '마탄'이었어.
이 곳은 8년 전 평양성 밖에서 벌어졌던 회전에서

거란을 추격하던 고려군이 역습에 걸려들어

회생불가의 타격을 받았던 바로그 곳이었지.(3부참조)

 

 

 

 

 기습.jpg

 

 

 

 

거란군이 평양성에서 무려 15.7km나 떨어진

마탄을 지나갔다는 건 고려 북방의 최대요새도시인

평양성마저도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는 의미였어.

 

이로인해 소배압의 목적이 '개경직공'이라는 건

분명해졌고, 때문에 여기서 거란을 막지 못한다면

개경은 사실상 함락이나 다름없었지.

 

전 편에도 말했지만 평양과 개성 사이에는

방어 요새는 커녕 여분의 군사도 없었거든.

 


그리고 조원은 이 곳에서 무려

거란군 1만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어.

 

 

  

 

거란군이 고진강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해도

아직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어.

고진강에서의 피해가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정말 회생불가의 타격이었다면 소배압도 철군을 했겠지.

 

때문에 이곳 마탄에 도달한 거란군은

아직 방어성조차 제대로 없던 개경정도는

무리없이 함락할 수 있는 군세였던 거야.

 

그리고 이제 평양성 우회도 거의 성공해

개성으로 향하는 길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어진

바로 이 순간에 조원의 사력을 다한 요격에 참패해

큰 발목이 잡혀버린거지.

(보통 전투에서 사망자보다 부상자가 훨씬 많은데다

영하의 날씨에 기진맥진했던 거란군이었기에

총 전투원 손실은 1만보다 훨씬 많았지)

 

 

 

오늘날에는 애석하게도 강감찬과 강민첨만이

기억되지만, 최후의 천하대전이었던 이 번

제3차 고려vs거란 전쟁에서 사실 고려의 승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이 조원의 '마탄전투'였어.

 

 

조원 역시 또 하나의 숨은 영웅이었지.

 

 

 

 

 images7XKQG0I3.jpg

 

<갓 조원>

 

   

 

 

 

...근데 거란제국의 최정예부대인

근위대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이 번 거란군이

생각보다 고전하는 모습에 의아해하는

게이들도 많을 거야.

 

 

사실 계절은 한겨울인 12월에 고려군의

감시를 피해 최고속도로 남하해오느라

거란군도 엄청나게 지쳐있었어.


어쩌면 그나마 근위대급 정예병이었기에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걸 지도 모르지.

 

 

 

전 편에도 기술했지만 거란군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현지조달(약탈)'로 병참의 대부분을

확보해왔는데 한 겨울에 척박한 한반도 북부땅에서

최대속도로 남하하느라 제대로 된 조달(약탈)도

 못한 채 지금까지 기진맥진하며 내려왔던 거야.

 

 

만약 10만 병력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좀 더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고진강 도하작전의

실패로 많은 손실을 입은 이상 이제 더이상의

손실은 용납이 되질 않았기 때문에

소배압도 조급했던 거지.

 

 

게다가 마탄전투에서 무려 1만명이나 사망했기

때문에 이제 개성 합락도 장담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어.

 

 

소배압과 거란군은 확실히 지쳐가고 있었지.

 

 

 

  패잔병.jpg

 

 

 

 

 

 


----개경으로----
 

 


한편 청천강 사령부에서

거란군이 평양성까지 지났다는

보고를 받은 강감찬은 또 한 번 당황했어.

 


평양성마저 돌파한 이상 개경까지 이르는 
거란군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강감찬은 곧바로 병마판관 '김종현'을 불러

기병1만명을 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란군을 따라잡으라는 특명을 내렸어.


개경함락만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지.

 

 

   갓감찬.jpg

 

 


허나 김종현이 아무리 사력을 다한다 해도

바람처럼 빠르다는 거란군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어. 
사실상 개성 노출은 이제 막을 수 없었지.

 

 

 

 

 

 

 

 개경1.jpg

<고려 수도 개성>

 

 

 

   

 

 

 

그리고 1019년 1월 3일. 
거란군이 드디어 개경에서 하루 거리인

신은현에 모습을 드러냈어.

 

 

 

강감찬과 소배압, 

마지막에 웃는 자는 과연 누굴까?

 

 

김종현의 결사대만이 동장군의 한파를

뚫고 사력을 다해 소배압의 뒤를 쫓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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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배압의 개경직공은 과연 무모하고

저돌적인 객기일까 아니면 과감하고

가공스런 진격일까.

 

세상의 많은 파격이 그러하듯 답은 결과만이

말해줄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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