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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한다.
'미국은 지정학적 위치가 너무도 뛰어나고 유리하다.'
'그들은 주변에 적국이없다. 그래서 강해진것뿐이다.'
맞는말이지만,
당시엔 아니었다.
오늘날의 강대국은 단순히 요행이 아닌..
선조들의 목숨을건 피비린내나는 혈투와 노력에 의해 쌓아올려져온것이다.
# 1. 독립전쟁 시대
미합중국의 탄생은 동부 해안지대에 위치한 당시 13개주들을 구성으로 시작되었다.
본국 (영국)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있는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였기에
멀리떨어져있는 미국인들은 유리하기도했지만 동시에 불리하기도 했다.
바로 영국이 해양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유럽내에서도 항상 최고수준의 해군력을 유지해온 막강한 해양강국이었으며,
해외에서도 전쟁을 지속할수있으며 보급로를 유지가능한 몇안되는 제국을 상대로
갓 독립선언을 한 13개주의 오합지졸 민병대가 전쟁을 치뤄야만 했었다.
당시 독립선언을 한 미합중국은 영토가 모조리 해안을 접한 형태였으며,
이렇게 항구가 모조리 노출된것은 미국에있어 최대의약점으로 작용하게된다.
영국해군이 자랑하는 막강한 전열함의 화포를 통한 지원포격과
다수의 선박을 동원한 상륙작전을 저지할만한 전력이
식민지국가 미국에게는 존재하지않았으며,
당시 최대규모의 거점항구중 하나였던 뉴욕항 일대를 초전부터 영국군에게 점령당하는등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된다.
뉴욕항을 비롯해 해안거점을 확보한 영국군은 원정전쟁의 최대문제인 보급로가 해결되었고,
거칠것없이 물자와 병력이 들어오며 본국으로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수있게되었다.
하지만 새로 문을연 대륙회의와 미합중국에겐 계속해서 난제가 요구되었다.
독립국가의 시장경제와 질서를 유지해야하는 '경제' 문제에 직면하게된것이었다.
영국과의 결별을 선언한 대륙회의는 이제 파운드화가 아닌 새로운 독자통화
'대륙달러' 를 발행하지만 화폐위조의 방지에 실패하면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더욱이 당시 본국과의 교역이 사실상 무역의 전부였던 식민국가 미국에겐 더이상 기대할만한 추가수입원이 존재하지않았다.
다닥다닥 국가들끼리 붙어있는 유럽과 달리 아메리카엔
미국과 교역해줄 국가자체가 존재하지않았던것이다..
경제는 대륙달러의 위폐난립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며 전비를 지출해야만하지만,
더이상 무역을 통한 추가수입은 존재하지않는다.
유럽으로부터 멀고도 먼 아메리카대륙에서 홀로 독립전쟁을 수행중인
신흥 미합중국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버린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초기 대륙육군 (컨티넨탈 아미)은 변변한 화기는 커녕
기본적인 피복류와 식료품등의 기초적 보급품조차 몇주간
구할수없을정도로 경제적으로 피폐해져갔다.
때문에 당시 유럽에서 미합중국과 대륙회의의 반란은
'누가 이기느냐' 는 이미 관건이 아니었고,
요는 '영국이 얼마나 빨리 이길수있느냐' 가 관건인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일개 식민지 독립국이었던 미합중국의 승리를 일말도 기대하지않았고,
미국에 대한 지원의사를 표명하지않았다.
어차피 영국이 이길게 뻔한 전쟁에서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돈만버리고 훗날 보복을 당하고싶었던이는 없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것은 사람 스스로의 힘이다.
그들은 레드코트의 막강한 전투력에 굴복하지않고
철저하게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며
영국군의 보급품을 탈취하고,
영국군의 대포를 노획하며,
영국인들로부터 빼앗은 물자를 전력으로삼아 싸우는 처절한 전쟁을 계속했다.
악랄할정도로 집요한 보급품약탈행위로 인해 영국군은 훗날 이 기간을 '보급전쟁' 이라고 명명한
개전초기 당시 뉴저지 북부에서 영국군이 대륙육군이 3달에걸쳐 펼친 게릴라공세로 인해
비정규전만으로도 피해를입은 병력은 지역총원 1만명중 1000여명가량이 사살되거나 부상당했다.
해안지대에 이어 강유역를 점령해 북부와 남부를 완전히 따로 고립시키고,
왕당파의 숫자가 적지않았던 남부로 진군하며 조기종전을 이끌려했던
영국군은 목숨을걸고 게릴라를 펼쳐오는 대륙군에게 계속해서 발목을 잡히며
전황은 점점 진흙탕싸움처럼 질질끌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777년말, 전황을 뒤집는 승전보가 울려펴진다.
그동안 대륙군의 승리는 소규모의 전투나 기습, 게릴라등의 전과정도뿐이었고
야전에서 정규전에 돌입할때마다 처참한 결과로 패주하는 약체의 모습뿐이었다.
때문에 유럽의 어느 국가들도 미국의승리를 기대하지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그 약체 미국이 야전에서 영국군을 꺾은것이었다.
그동안 야전에서 수도없이 깨지고 패주하면서 쌓아온 경험치가 마침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사라토가 전투였다.
영국군의 존 버고인이 이끌던 8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회전(會戰)이후 반수인 4000명수준으로 격감시켜버린
실로 역사적인 승전은 대륙군에게 닥쳤던 최대의 위기를 최대의 전환점으로 일거에 전황을 뒤집어버렸으며,
뿐만아니라 정규전에서 영국군이 일개 식민지 민병대에 패전했다는 소식은 너무도 인상깊었기에
사라토가 전투의 승전소식은 유럽전역에도 보도되면서 큰 화제가된다.
[+ 훗날 미해군의 항공모함의 이름에도 사라토가 라는 이름이 붙는다. (CV-60 사라토가) ]
미국은 식민지 독립국가가 지배국가를 상대로 격퇴할수있다는 힘과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새로운 스폰서를 맞이하게되는데
바로 영국과의 철천지 원수, 프랑스였다.
이때 미합중국은 단순히 총칼만쓰는 실제전쟁뿐만아니라
무대커튼 너머의 뒷막싸움이라 할수있는, 외교전에도 돌입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을 일찌감치 1776년부터 대륙의회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해
프랑스의 미국에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는등
뒷무대에서도 치밀한 물밑작업을 행하고있었던것이다.
미합중국의 가능성과 영국을 견제하며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프랑스는
마침내 1778년 2월에 미합중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다음달인 1778년 3월에 미국독립전쟁에 참전을 선언,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제 미국독립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전쟁은 마침내 『국제전』 으로 돌입하게된것이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홀로 싸우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미국인들에게 최초의 동맹군이 생긴것이었다.
프랑스의 참전으로 인해 미국의 독립전쟁은 더이상
식민지배국과 식민지간의 반란,소요사태가 아닌
'국제전쟁' 으로 성격이 바뀌며 큰 사건으로 발전했고,
프랑스의 미합중국에 대한 막대한 차관과 원조는 피폐해져가던
대륙의회의 살림을 회생시킨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다.
뿐만아니라 프랑스와 교역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전시경제체제하에서 다시 통상수입을 얻을수있게되었다.
이때 독립전쟁당시의 대륙육군은 강제징발하는 '징병제'가아닌 자원입대를 받는 '모병제' 였고,
제대까지 복무기간은 불과 단 1년에 불과했다.
따라서 77년다음해였던 78년에 병력충원이 이뤄지지않으면 서서히 병력자체가 제대하고 없어서
독립전쟁 수행자체가 불가능해질수도있는 참담한 상황이었던것이다.
하지만 급박한상황에도 그들은 '자유'를 강조하며 절대로 시민들을 강제로 징집하지않았으며,
전쟁기간중에 대륙육군병사들의 월급이 늦게지급될때마다 항의시위가 일어날때에도
최대한 빨리 예산을 만들어내 군대의 사기를 신경쓰는 민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이는 결코 과장이아닌 실제 정사에 기록된 사실들이며,
극한상황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도리를 지키려는 미국인들의 일면을 느낄수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실 당시 미국내에도 왕당파성향의 시민들의 숫자가 결코 적지않았기에
강제로 징집할수없었던 형편도 존재했던것또한 사실이다.]
때마침 역사적인 승리인 사라토가 승전이후 대륙육군에 자원입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워싱턴과 대륙군 수뇌는 전쟁기간 내내 최대약점이자 골칫거리였던 병력의열세마저 뒤집고
독립전쟁 후기에 이르러서는 영국군을 총병력규모로 완전히 압도하기에 이른다.
매번 해전에서 자국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던 영국군을 손보고싶어서
단단히 벼르고있었던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약 2배에가까운 함선을 동원한다.
당시로썬 귀중한 대함(大艦) 전열함만해도 무려 28대를 동원해
체서피크만에서 격돌, 압도적인 숫적우위에 의해 승리한다.
미국에있어 최대의 골칫거리였던 영국군의 해상전력도 프랑스에의해 산산조각이 난것이었다.
이제 개전초기에 미국이 감수해야했던 모든 불리함은 역전되었다.
사라토가의 승전이후 유럽으로부터 독일과 프랑스계 군사고문들이 파견되면서
야전에서 맞닥뜨릴때마다 총성에 기겁해 멋대로 대열을 이탈해 패주하기바쁘던
오합지졸 민병은 군사고문들에의해 유럽식 정규군교리로 철저히 재교육되었다.
이제 그들은 영국군과의 라인배틀에서 도망가지않는다.
이제 그들은 프랑스해군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당당하게 화력전을 펼칠수있다.
이제 그들은 보급품이없어 헤진옷과 굶주린배를 쥐어잡는 거지민병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대군을 앞세워 덤벼오던 영국군보다 더한 물량을 앞세워 규모로 압도할수있게되었다.
미국-프랑스 연합군 약 16000명과 영국군 약 7000명이 격돌한
요크타운에서 격돌, 지상전에서도 마침내 영국군은 마지막남은 주력이 완전히 패배한다.
또한 해상은 프랑스해군에 의해 차단당하면서 영국군의 퇴로조차 사라졌다.
이제 더이상 영국군이 할수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그들은 결코 상상할수없었던, 최고로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했다.
일개 식민지 민병대와 시작했던 전쟁에서 대영제국이 패배한것이었다.
독립전쟁 당시,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전혀 유리하지않았다.
애초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의 지리정보는 주둔하고있었던 영국군측도 꿰고있었으며,
보급과 중화기, 병력 모든측면에서 영국군이 미합중국의 대륙육군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뿐만아니라 미국은 개전초기에 일찌감치 거대항구거점을 잃고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이 자연의 축복만으로 성장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 그들에게있어서 축복이었던것은 지정학적 위치의 덕이아닌,
자유를 위해 싸웠던 위대한 선조들이 있었기때문이 아닐까.
아메리카에서 홀로 싸워낸 미국인들의 피비린내나는
투쟁이 마침내 지정학적 특성을 유리하게 만든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합중국은 그저 지배자로부터 잠깐 해방되었을뿐인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미국인들의 노력은 독립전쟁 이후에도 계속된다.
1775년부터 시작해 1783년에 종결되는 8년에걸친 전란의끝에
미국은 마침내 독립에 성공하였다.
이제부터 그들은 '주인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국가를 부흥시켜나간다.
#2.독립초기 시대 (1783~)
우선 미국인들은 제1차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전쟁중의 전시상황에서조차도 한번도 일치단결된적이 없었다.
미국내에서도 독립을 바라지않던 친영왕당파 시민의 숫자는
독립을 주장하던 대영강경파에 못지않게 결코 무시할수없는 숫자였다.
때문에 매번 병력난과 재정난을 호소하는 상황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대륙육군은 강제로 시민들을 징병할수없었고 예비병력에 대한 훈련기간을 갖출수없었다.
본래부터 영국에서 건너온 영국인들이 만든 식민지국가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였다.
결국엔 여론이 분열되있는 상황하에서도 강경파들의 기지를 통해 독립을 쟁취해내긴했으나,
이 시기의 미국인들은 아직 자신들이 '하나' 라는 생각을 결코 하지않았다.
친영과 반영으로 나뉘던 사상대립은 독립이후엔 '연방주의자' 와 '반연방주의자' 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오죽하면 이시기의 우스갯소리로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는 같은 술집에서 술도마실수없을정도로 관계가 험악했다."
라는 말까지 나올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내부의 정치적상황하에서도 곧바로 내전이 발발하지않는 억제력이 작용하고있었는데,
그 억제력은 '광활한 북미대륙' 그 자체였다.
그들은 아직까지 동부 해안지대의 13개주에 겨우 발을 내딛은것에 불과했고,
서쪽으로는 아직도 헤아릴수없는 대지가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리고 '그들로써는 해치워야할 적들' 도 말이다.
첫번째 적은 서부의 광활한 대지에서 기다리고있는 '인디언' 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인디언이 아닌 'Native American' ..즉 아메리카 원주민 으로 정의하는 이 토착민들은
아직까지 지역단위로 흩어져 중앙집권화 되지않은 부족사회수준에 머물러있었다.
엄밀히 말해서는, '아메리카의 천혜의 자연에 의해 문명이 발달할 필요성이 그동안 없었기때문에' 발달하지않았던것이나
이러한 상대적인 관측의 시각은 현대에 이르러서야 정립된 개념이었다.
당시의 백인국가 미합중국에게 있어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같은 문명인으로 대우해줄수없는 야만인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인과 백인들에게 있어서 이들은 제거해야할, 토벌되야할 짐승들로 여겨진것이었다.
침략의 이유는 같은 백인종이 아니고, 그들의 문명의힘이 너무도 약했기에, 단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침략,정복행위를 '제국주의(imperialism)' 라고 정의한다.
미국의 서부진출을 향한 '프론티어 정신'에는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학살이 내포되있었다는것은
오늘날 역사를 배우는 미국인들에게있어서도 가장 불쾌한 진실중 하나이다.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지닌 광활한 서부의땅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탐이나는 새로운 농경개척지로써 구미를 자극하기 충분했고,
적어도 북미대륙을 모조리 백인의깃발아래에 점령하기전까지는
같은 백인종인 미국인들끼리의 내전이 일어나지않게하는 강한 억제력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두번째 적은 그들이 독립전쟁때 싸웠던 식민지배국이었던 다름아닌 '대영제국'이었다.
독립이후 '미합중국령' 으로 명명되는 북미대륙 동부의 13개식민주에서는 패전해 쫓겨난 그들이었으나,
영국에게는 아직 북미대륙 북서부방면의 '캐나다' 라는 거점에 50만명이 남아있었다.
영국은 캐나다라는 북미대륙 거점을 통해 미합중국에 적대적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약간의 총기와 탄약류를 지원함으로써 간접적인 견제를 행사하는 수준에 그쳤으나,
미국인들에게 있어선 캐나다라는 식민거점의존재는
'언제든지 대영제국이 우리에게 다시 쳐들어올수있는 여지' 로써
신생 미합중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공포의 상징이었다.
이런 배경속에서 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서부로 진출하게되는 기폭제가 등장하는데,
독립전쟁 종전으로부터 20년이 흐른 1803년에 체결된
미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교적성과중 하나로 꼽히는 '루이지애나 매입' 이었다.
1800년에 제3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토머스 제퍼슨'의 행정부에 성사된 이 영토매입체결은
매입후 1803년기준으로 국토의 무려 50%에 달하는 북미대륙 중앙부의땅을
아무런 전쟁과 인명피해도 없이 1500만달러의 대금을 프랑스측에 지급한다는 서명 하나로 성사된것이었다.
하지만 루이지애나 매입의해인 1803년 당시 기준으로는 1500만달러는 신생 미합중국에있어서는 엄청난 거금에 해당했다.
의회와 국내의 여론에서도 당초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를 900만달러에 인수' 하려고했던 당초계획에 비해 터무니없이
규모가 확대되어버린 이 빅딜에 대해 반대여론이 치솟았다.
본래 토마스 제퍼슨 행정부가 표방하고있던 정책이 국채를 감소시켜나가는것에 중점을두는 '긴축재정'에 가까웠던
그간의 태도에서 180도 선회한것또한 여론의 비판을 불러들이는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그럼에도 제퍼슨은 루이지애나 매입이 성사될경우 장래 미합중국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할수있게될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때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입의 성사과정에서 야당측에서는
그의 파격적인 행보에 대해 '월권행위' '법률파괴자' 라는 비판으로 야당이 매섭게 공격했으나
토머스 제퍼슨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법조문을 엄격히 준수하는 일은 선량한 시민의 중대한 의무 중 하나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의무는 아니다.
법률 문구에 집착하느라 조국의 파멸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법 자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
즉, 수단 때문에 목적을 희생해 버리는 일이다."
즉 자신의 초법적 월권행위에 대한 지적에대해서는 부정하지않았으나,
그는 대국적인 관점에서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법률에 대한 생략이 용인될수있다고 주장한것이었다.
결국 제퍼슨의 사력을 다한 설득끝에 루이지애나 매입은 마침내 체결되었지만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법률의 가치를 강조하던 미국대통령이 스스로 경우에따라서는 법률을 무시해도된다는 주장을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잠재적인 미합중국의 분열을 낳게될것이라는 비판적시각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대두된다.
하지만 그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했을때 토머스 제퍼슨 행정부가 남긴 '루이지애나 매입' 은 위대한 위업임이 틀림없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미국이 동부에서 서부로 향할수없도록
정중앙의 길목을 차단하고있었던 프랑스령이라는 거대한 벽을 뛰어넘는것에 성공한것이었다.
결국 길고긴 여론설득끝에 루이지애나 매입이 체결된 당해 1803년,
뉴올리언스에 주둔중이던 프랑스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깃발이 내려가고 성조기가 계양되면서
미국인들을 서부로 향하게하는 기폭제가 서서히 불이붙기 시작했다.
동부의 '식민소국'이 '대륙국가' 로 등극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제 미합중국은 벌써 북미대륙의 절반을 석권한 대륙패권국으로 팽창해버렸고,
이후 서쪽과 남쪽으로 진군하게되는것은 이 순간부터는 필연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본격적인 서부 프론티어붐이 일어나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유럽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유럽의 상황을 알기쉽게 이해할수있도록 돕기위해
미국독립전쟁 시기로 잠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겠다.
개전초기부터 사라토가 전투에 이르기까지는 미합중국과 대륙육군은 자력으로 영국군에 대항해왔으나
이후 프랑스측과 동맹이 체결된시점부터는 프랑스라는 조력자의 존재는
미국독립전쟁사에있어서 '게임체인저' 그 자체라고 할수있었다.
8년에 달하는 긴 전란을 버텨내고 승전에 이르를수있었던건 실질적으로 80%정도는 프랑스의 도움덕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미국독립전쟁에 있어서 프랑스의 영향력과 도움은 지대했었다.
하지만 미국을 독립시켜 대영제국을 견제하기위해 전쟁을 택한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오랜시간 방치되어왔던 프랑스식 봉건체제의 수많은 병폐와 한계에 달해있던 국고에 더해진
미국 독립전쟁의 전비지출은 프랑스왕정이라는 거대한 댐에 큰 구멍을 뚫어버린것이었다.
그 구멍의 균열이 점점더 커지면서 마침내 댐 그 자체가 붕괴되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독립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 이 촉발된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역사의 나비효과가 일으킨 파장은 오늘날까지도 화자되는 위대한 전쟁영웅을 탄생시키는데,
미천한 시골태생의 말단 포병장교로 시작해서 불과 25살의 나이로 '대장'직위에 오르는 신화를 쓴뒤,
더나아가서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황제의 자리에올라
정복군주로써 전유럽을 호령하게되는 '나폴레옹 1세'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의 등장이었다.
이후 1803년경에 루이지애나를 매각한 프랑스측의 지도자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장은 전유럽을 전화(戰火)속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왕족을 자신의 손으로 처형해 시민혁명을 이룩해낸 프랑스혁명은
유럽의 왕정국가들에 있어서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광기로 비쳐졌고,
그동안의 해묵은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전유럽의 왕국이 단결해 진압할필요가있는 폭동으로 간주되는 대사건이었다.
그렇게해서 유럽권에선 프랑스를 타도하기위한 '대프동맹(대불동맹)' 이 결성되었으나..
나폴레옹이 오늘날까지도 화자되고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는 당대에 '전쟁의신' 이라고 불리울정도로 막강한 전쟁지도자였다.
1800년대초 전유럽이 프랑스를 타도하기위해 적국으로 돌아선 고립무원의 상황하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프로이센을 모조리 격파하고 굴복시키는 말도안되는 승전에 성공한다.
이미 유럽대륙 본토의 육군강국들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제압된 절망적인 상황속에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수성을 지니는 영국만이 홀로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이어가고있었다.
당시의 프랑스는 세계 제2위의 해군강국으로 결코 얕볼수없는 전력을 지니고있었고,
당시를 기준으로 가장 최근에 격돌했었던 미국 독립전쟁시기에는 프랑스해군이 영국해군을 격퇴해낸 전력도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영웅은 프랑스에만 출현한것이 아니었다.
1780년대에 영국군으로써 미국독립전쟁때 참전한 세대로,
프랑스에게 졌던 원수를 기억하고있었던 한명의 제독이 나폴레옹의 거칠것없는 패도앞에 등장했다.
영국을 구한 구국의영웅으로 불리우는 위대한 제독 '호레이쇼 넬슨' 의 등장이었다.
1805년 10월, 프랑스해군에 치명타를 안겨준 '트라팔가 해전' 의 패배로인해
끝이 보이지않던 나폴레옹의 야망이 마침내 꺾이기 시작한다.
트라팔가 해전의 패배로 격노한 나폴레옹은
현실적으로 영국을 해군간 함대결전으로 굴복시키는것이 이젠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통해
영국을 멸망시킬 새로운 계책을 내놓는다.
'대륙봉쇄령(Blocus continental)' 의 시작이었다.
유럽본토의 전역에 영국에 대한 무역을 금지하는 봉쇄령을 내리고
프랑스의 잔존해군력을 대륙의 연안을 감시,봉쇄하는 작전에 투입함으로써
국내에 상선의 유입이 사라진 영국을 전투없이 내부적으로 굶겨죽이겠다는 통상파괴전에 들어간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해군력에서 압도하기 시작한 영국은
대륙봉쇄령에 맞서 역으로 영국해군이 프랑스와 본토측의 상선을 격침시켜
프랑스측의 상업활동을 정지시키는 맞불을 놓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로인해 1783년의 미국 독립전쟁 이후로는 잠잠했던
미합중국과 대영제국간의 대립이 시작되는데...
이때 미국은 독립전쟁때의 관계를 계기로 1800년대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와의 무역이 큰 수입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대륙봉쇄령에 대한 맞불노선으로 시작한 대프랑스 해상봉쇄로 인해
미국의 민간상선들이 계속해서 나포되거나 격침되는 일이 보도되면서
미국내의 반영여론의 도화선에 불이붙기 시작했다.
심지어 영국해군측은 대프랑스전을 수행하면서 모자라는 병력을 충원하기위해
미국측 상선의 미국선원들을 무단으로 영국해군에 강제징병해서 부려먹는 피랍행위까지 일삼았다.
그러던중 1807년경 미국국적 상선인 '체서피크호'가 버지니아 근해에서
영국해군측의 정선명령에 거부하다가 포격에의해 선원의 다수가 사살당하는
체서피크호 사건이 터지면서 미국내 전쟁여론과 분노는 마침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루이지애나매입을 계기로 계속해서 서부에 진출하고있던 미국인들은
캐나다루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은 인디언들의 거센저항에
상당한 희생자를 내고있는 상황까지 겹치고있었다.
영국측의 계속되는 위협행위와 계속되는 오만한 태도로 인해 미국인들의 분노는
마침내 대통령도 통제할수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2차 독립전쟁 .. '영미전쟁' 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