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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미국의 지정학적 위치 2편

과정 2017. 10. 26. 15:32


체서피크호 사건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미국인들은 독립이후에도 사사건건 옛상전 영제국의 견제를 받으며 고초를 치뤄야했지만,


자국영토에서 백주대낯에 자국의 군함이 선제공격을 당한다는것은 


애써 억누르고있던 미국인들의 인내심을 끝장내는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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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합중국의 3번째 대통령으로 집권중이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은 사건이 터진이후


"렉싱턴 전투 이후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이 그러한 분노의 상태를 겪어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 하나로 되어본 적도 없었다."


라고 발언했을정도로,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감과 분노는 엄청난것이었다.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로 대립중이었던 미국인들이지만 이번만큼은 계파를 뛰어넘어 일제히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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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국은 체서피크호 사건 이후에도 


미국상선을 나포하여 화물을 빼앗거나 미국인선원을 자국군에 강제징용하는 해적행위를 계속하였고,


이는 자유와 권리를 중요가치로 여기던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굉장한 불명예이자 참기힘든 굴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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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퍼슨 행정부는 미국이 전쟁중인 대륙과 교역을 지속함으로써 


유럽대륙과 연관되었기에 이러한 참사가 벌어진다고 생각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양측과 교역을 하지않고 자국상선들의 활동을 제한하면 사태가 해결될것이라는 발상에서


당해 1807년, 자국선박의 외국교역을 금지하는 통상금지법(Embargo Act of 1807)을 시행한다.


평화를 위한 미합중국의 회유와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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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쟁이아닌 평화적, 경제적 해결책과 외교를 통하여 미-영 대립관계를 


해소하고자했던 토머스 제퍼슨의 바람과는 달리 통상금지법은 실패한다.


아직 미국은 내수경제만으로 자국의 수요를 감당하고 수익을 낼수있을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3류국가였고,


분쟁이없는 아메리카 대륙내에는 교역대상국으로 삼을만한 국가도 마땅히없기에 성립할수없는 해결책이었던것이다.


미국인들은 먹고살기위해 어쩔수없이 위험을 각오하고 계속해서 법을 무시하고 유럽대륙을 향해 밀무역을 시작했고


심지어 인디언들을 지원하는 철천지 원수인 영국령 캐나다와도 밀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른 미국상선의 피해는 나날이 누적되어만가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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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데덮친격인지, 영국을 위시한 유럽대륙의 각국들은 미국상선과 미국인에대한 해적행위를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며 노골적으로 미국측에게 공개적인 외교적모욕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미국이 아직까지 인구와 경제수준, 군사력 모든면에서 유럽에 상대가안되는 약소국이란걸 잘알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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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 사과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도의적인 유감표명정도만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던 


미국내 지식층들과 회유책으로 전쟁을 회피하려던 정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유럽의 도발은 불씨에 기름을 들이붓는양 미국인들을 통제할수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통상금지법의 실패와 허구성에 의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또한 폭락하였고,


이에 제퍼슨은 임기말 1809년 3월1일 에 결국 통상금지법을 폐기하며 


유럽의 도발에대한 미국의 평화적 해결시도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게되는꼴이었다.




이제 시대는 전쟁은 피할수없게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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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독립이래 외부로부터 최대의 도전을 받고있던 암울한시기..


1809년,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뒤를잇는 


미합중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이 당선되어 집권한다.



그는 이전정권에서 루이지애나 매입을 감독하였을뿐만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회피하기위해 애쓰려던 제퍼슨에 동조해 


제퍼슨행정부의 통상금지법에도 지지선언을 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조차도 이제 미국에대한 영국의 도발에 미온적태도로 버틸수없다고 판단하게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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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6월 18일, 마침내 미국이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뒤 


영국령 캐나다를 침공하면서 제2차 미영전쟁(War of 1812)이 시작되었다.


옛주인의 횡포에 해방식민지인들이 먼저 실력행사에 나선것이었다.


의회에서는 하원에서 61%의 찬성을, 상원에서는 59%의 찬성표를 받으며


양원에서 과반수이상의 지지를 받으며 정식적으로 표결처리되었고,


이것은 미합중국이 타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것에대한 최초의 표결이었다. 





1868~1921캐나다.png  1795성조기.png


이시기, 영국령 캐나다의 인구수는 약 50만명에 불과했으나


신생 미합중국의 인구수는 약 700만명으로, 인구수에서 미국은 14배에 달하는 숫적우위를 점하고있었다.


거기에 캐나다에 주둔중인 병력은 소수의 영국정규군에 민병대를 포함하여도 총 5천명에 불과한 규모로,


마찬가지로 군대의 규모는 작았던 미합중국이지만 캐나다측보단 병력이 근소하게 더많았으므로


상당히 승산이있는 싸움이라 여겨진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독립해버린 미국과 영국본토간 거리는 무려 5000km 에 달했고,






결정적으로, 캐나다를 수호해야할 영국은 유럽전역이 프랑스군과의 전쟁에 대처하는것으로도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영국군의 해외원정군이 캐나다를 구원하러 올수없을것이라는 확신은 미국인들의 결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군세를 막아내기위해 영국군의 육전병력은 이베리아 반도를 비롯한 유럽본토에서 발이 묶여있는 상태인것도 사실이었다.


강력한 영국의 해군또한 프랑스의 대륙봉쇄령에 맞서 역봉쇄에 동원되야했기때문에 한척도 발을뺄수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순수하게 미국 vs 캐나다의 싸움이 될것이니, 


미국인은 군대를 이끌고 캐나다땅으로 진군하기만 하면


승전으로 끝날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내포한 여론마저 생겨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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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시기 미군의 보유전력은


겨우 육군 병력 7000명 , 해군 보유함수 14척 으로 초라하고도 빈곤한 상황이었다.


실질적인 전쟁에 대한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않은 상태에서


강대국인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후 진격을 감행한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이들도 소수 존재했다.


(※ 동시대인 나폴레옹 전쟁시대에 영국해군의 팽창이 정점에 이르렀을때 해군병력만 14만을 넘어섰으며, 

 당시 군함의 최고등급 함선인 '전열함' 의 보유수량만 170척이 넘어갔고, 해군의 총 함선수량은 600척을 넘어섰다. 

 이것이 그 시대 유럽과 아메리카의 국력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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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상과달리 실제 전쟁이 시작되자 각 주에 주둔하고있는 민병대와 정규군들중 일부는


캐나다 국경을 넘어 진격하는것에 반발하거나 거부하는 사례까지 등장하였고,


의회에서 전시에 35000명까지 규모를 확대하기로 승인하였지만 독립전쟁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징병제가 아닌 지원제였던 미군에 지원하는숫자는 굉장히 적었다.


때문에 미국측은 자신들이 계획한것만큼 대규모병력을 동원하는것에 실패하게된다. 


(※아직까지 초기 미국에서의 '군인' 이라는 직업은 굉장히 인기가 없는 천직인데다가 

 급여까지 적어서 인기가 바닥을 쳤다. 오늘날의 미국을 알고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떠오르지않을 상황일것이다.)




 


신생 미합중국의 군기강과 동원시스템이라는것은 예전 독립전쟁시대 초기와 별다를것없을정도로


자신들의 상상이상으로 개판이었던것이다......


막연한 자신감만으로 최초로 선전포고로 전쟁을 시작해본 댓가는 상당히 비싼 수업료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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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식민제국을 건설한 노련한 강대국이자 헤게모니 주도국이었던


영국은 자신들이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서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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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초기시대에 미합중국에 대항하여 연합체를 구성해


미국인들의 침략에 항전했던 전설적인 인디언 지도자, 테쿰세에 대해 일찌감치 지원을 하고있었던 스폰서 영국은


테쿰세 뿐만아니라 그의 친인척과 다양한 부족들과 우호적인 밀월관계를 지속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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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캐나다를 경유해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아온 인디언들은 전쟁기간동안 영국의 편에서서 미국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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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군사적측면 이외에도, 미국의 내부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독립전쟁 시대와 달리 이번엔 미합중국측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한 전쟁이니만큼


적극적 지지와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이미 오랜기간에 걸쳐 영국해군의 해적행위에 의해


피해를 입은 데미지가 누적되고있었던 미국의 재정상황은 상당히 피폐해져있었다.


뿐만아니라 루이지애나 매입이라는 거대한 빅딜을 체결한것도 불과 얼마전의 일이었다.



모병을 위해 발족된 미합중국 전쟁위원회에 대해 보스턴 거래소의 군중은 야유를 보냈고,


북서부의 사립은행장들은 전쟁에 낼 자금은 한푼도없다며 반발하기까지 이르고있었다.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라는 단면전 여론과는 달리


준비되지않은 최초의 전쟁은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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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적으로 혼란이 거듭되는 1812년 6월경, 


윌리엄 헐 장군이 이끄는 미군 선봉 1000여명은 디트로이트 강을 건너


캐나다의 샌드위치 타운을 점령하는 소소한 승전보가 날아들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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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달만인 1812년 8월경, 수복에 나선 영국군의 반격이 몰아치면서


침공당시보다도 2배인 2500명에 달하는 병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헐이 이끄는 미군선봉은 패전,


캐나다 국경에서 패주해 디트로이트에서 항전하지만 캐나다측의 병력이 더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미국령까지 추격해온 캐나다-인디언 연합군에게 항복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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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미군이 항복한 적군에는 인디언 지도자 테쿰세까지 현장에 위치하고있었다.


미국인이 인디언에게까지 당한, 예상외의 굴욕적인 패배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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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미합중국은 전쟁초기목표였던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비롯한 주요도시 점령이라는 거창했던 청사진과 달리,


항복에 의해 도망쳐온 디트로이트 조차도 포기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국령인 미시간준주의 통제권을 상실하게되면서 상황은 갈수록 나빠져만갔다.





 


예상외로 캐나다방면의 영국군의 저항이 완강하자 


당황한 미국은 2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친뒤 캐나다 국경을 향해 재침공을 개시하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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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812년 10월 13일, 퀸스턴 하이츠 전투가 벌어졌다.


민병대 포함 총 3550명의 병력을 동원해 2개월만에 재도전해온 미군은 


정규군,민병대에 인디언까지 끌어모아도 불과 1300명뿐이었던 영국측 방어군에 의해 격퇴, 


미군은 또다시 패전한다.



개전초기부터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대등하게 전쟁을 지휘해온 


영국군측 아이작 브룩장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영국또한 추후 전쟁에있어서 불리한결과를 낳게되는 계기가 되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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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병력:3550명 (우세)


미군측피해:270 사상자, 850명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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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병력:1300명 (열세)


영국측피해: 106 사상자, 22명 포로


라는 누가봐도 미군의 패전을 의미하는 이 전투의 교환비는 


미국인들에게있어서 정신적 데미지를 주기에 충분한 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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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미국인들의 상상보다 훨씬더 강대한 나라였던것이다.


단지 프랑스의 도움으로 독립한이후, 은연중에 그들의 옛상전의 실력에 대해 망각하였을뿐이었다.

 


겨우 인구수50만에 불과해 몇주안에 점령할수있을것만 같았던 


영국의 약소 식민지 캐나다는 이제 미국인들이 쉽게 점령할수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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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제로 캐나다는 난공불락이 되었다.


1813년도에 접어들어서도 미군은 자국보다 숫적으로 열세인 영국군을 상대로 


계속해서 숫적우위상황에서도 패전하였고, 


당초 목표였던 몬트리올 점령은 단 한번도 실현되지못했다.


미군이 잠시동안 온타리오 호수 일대의 통제권을 획득한적은 있지만, 


이내 캐나다군의 반격에의해 상실하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진흙탕 싸움이 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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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육상뿐만아니라 해상에서도, 미대륙 연안에서는 그 문제가 더 심각했다.


주전력이 유럽본토에서 발을 뺄수없었음에도 아메리카방면의 영국의 해상전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함선의 질적우위와 숫적우위를 모두 점한 영국측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미국의 해안에도 봉쇄선을 구축해 미국의 유통망을 마비시켜나갔고,


틈만나면 해안지대를 급습하여 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약탈하였으며


심지어는 해안지대의 미국인들로부터 죽기싫으면 돈을 내라는 식의 보호세까지 걷어가는등


영국측은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개전초기 압도적인 실력차이를 보여주었다.



미국인들의 희망은 점점 사라져가고있었다.







 
하지만, 개전초기부터 내내 당하기만하던 미국측에도 마침내 반전이 시작되었다.

온타리오 호수일대의 통제권을 보유한 시기에 미국은

온타리오호의 색케츠 항구에서 긴급 전함증대계획을 발동,

본국에서 새롭게 징병해온 3000명의 해군병력으로 온타리오 호수를 장악하기위한 새로운 함대를 만들어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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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813년 9월10일 미군의 신함대와 영국의 함대가 격돌, 이리호 전투가 벌어진다.


육상전에서는 계속해서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던 미군의 야심작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 전투에서 패전한 영국군의 해상전력은 모조리 나포되어 미군에게 넘어갔고,


온타리오호 일대의 제해권이 미군에게 장악되는 최대의 반전이 시작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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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함선:스쿠너 5척 ()

           브리그 3척

           슬루프 1척



미군측피해:브리그 1척 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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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함선:횡범선 2척 ()

           브리그 1척

           스쿠너 2척

           슬루프 1척


영국측피해: 전함대 나포됨



그동안 미군과달리 영국군은 해상을 통해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 전개할수있었던 이점이


이 전투를 기점으로 온타리오 호 일대에서 완전히 상실되었으며,


나포한 영국측 함선들을 통해 미군의 해상전력이 확실하게 증가됨과 동시에


미국은 개전초기에 잃었던 디트로이트 거점을 다시 확보하게되었다.



더욱이 이번엔 미군측이 열세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생함대로


해상강국 영국을 상대로 해전에서 압도적인 승전을 거뒀다는점에서


이 전투는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물로 작용할수있었다.



육상에서 계속되는 패전으로 바닥까지 저하되어있던 사기까지 역전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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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타리오호 방면 신함대의 건조와 이리호전투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을 지휘한


미해군의 '올리버 해저드 페리(Oliver Hazard Perry)' 사령관은 일약 영웅으로 등극하였고,


그에게는 '이리호의 영웅' 이라는 별칭까지 붙었을정도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페리의 활약은 그야말로 서부전선의 국면을 전환시킨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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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담이지만, 훗날 미해군함선을 이끌고 동양으로 향해 '쿠로후네(黒船) 사건' 을 통하여 

일본을 강제개항시킨 매튜 캘브레이드 페리는 그의 동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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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미국 서부를 향해 밀려들어오고있었던 영국-인디언 연합세력은 이리호의 패배를 기점으로


밀리기 시작하며 후퇴를 거듭하던끝에 나이아가라 방면까지 몰리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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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세를 몰아 1813년 10월 5일에 온타리오호 일대에서 벌어진 테임즈 전투에서도 


윌리엄 헨리 해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이 승리한다.



이때 영국군은 테임즈전투에 참가한 1300명의 병력중 무려 579명이 포로가 되면서


사실상 괴멸당한것이나 다름없었고, 


더욱더 최악이었던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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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동맹의 지도자였던 쇼니족의 테쿰세까지 테임즈전투에서 사망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영국-인디언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버리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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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계속 패전을 거듭하던 육상에서도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테임즈전투의 지휘관은


페리에 이어 두번째 영웅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장군으로, 


그는 훗날 미국의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제2차 미영전쟁은 훗날 대통령이 될 인물만 2명을 배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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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시대에 그러했듯이, 초창기엔 영국군에게 깨지기만 하던 미군은


이번 2차전쟁에서도 마침내 해상과 육상에서 서서히 승리를 따내기 시작한것이었다.


독립전쟁과 2차 미영전쟁을 통해 무수히 패배하고 실패하며 시행착오를 겪어온 


미국인들의 가장 무서운점은 다름아닌 '학습력' 이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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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권리를 강조하는 이 개인주의집단은 처음엔 굉장히 무기력한듯 보이지만


한번 불이붙으면 유럽인들에 뒤지지않는, 대등한 존재가 될수있다는것을 


노력과 의지를 통해 증명해보이는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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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된 전쟁이 시작된이후 영국해군측의 해안지대 약탈과 봉쇄령에 맞서서


미해군측은 정면대결을 피하고 영국의 상선과 보급화물선만을 나포하는 


'통상파괴전' 노선의 교리를 수립하여 대항했다.


함대결전에서는 질적으로든,숫자에서든 완전히 열세인 미해군측에서는 당연할수밖에없는 선택이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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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미해군의 선택은 굉장한 성공을 거둬 


4개월동안 영국으로부터 219척을 나포하는등 대단한 성과를 낸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피폐해지고있는 와중인 영국측에게 막대한 경제적 타격과 보급난을 일으킬수있었다.



오히려 해안지대에서 약탈당한 미국인들의 피해보다 


해양강국 영국측의 피해가 갈수록 심해지고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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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상선나포뿐만아니라 해군함선간 교전에서도 미해군의 활약은 빛을발했다.


조지 워싱턴이 이름을 붙인 USS 컨스티튜션호 (헌법호)는 중후한 이름에 걸맞게,


영국해군의 38문 프리깃 HMS 게리에르와 교전하여 단함전투에서 승리, 적선인원의 1/3을 전투불능으로 만든뒤


항복을 받아내어 미해군 역사상 최초의 단함전투 승리를 강적 영국으로부터 따낸것이었다.


(※이 역사적인 함선은 미해군에게 귀중하게 대접을 받으며 보존되어, 

오늘날 2015년에 이르기까지 200년이넘도록 현역으로 배치되어 운용이 가능한 범선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전쟁은 완전히 전세가 뒤집어져 미국의 승리에 다가서는듯하였다.




하지만..유럽의 상황은 또다시 변화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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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제2차 영미전쟁을 하는 1812~1813년동안


같은시기 러시아원정을 감행한 프랑스군은 참패를 기록하고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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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동맹군에게 패전한 이후 


계속해서 입지가 흔들리고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1814년 4월6일부로 


프랑스는 왕정이 복고되면서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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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전쟁이 영국과 대프랑스동맹군의 승리로 끝나가고있었던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상정하지못한 최악의 상황이었고, 


예상대로 영국군은 나폴레옹 전쟁이 일단락되어가자 아메리카대륙으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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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폴레옹이 실각한지 4개월만인 1814년 8월24일, 블래던스버그에서 미군과 영국군이 격돌한다.


4500명의 병력을 동원해온 영국군에 비해서


6500명의 병력을 방어군에 투입한 미군은 숫적우위는 점했지만, 


대다수의 병력이 훈련이 매우 미흡한 신병과 민병대인 반면 영국측의 병력은 모두 정예병이었다.



영국군의 대대적인 반격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미군은 블래던스버그 전투에서 참패하고 영국군은 압도적인 승리의 결과물로


미국역사상 최초로 수도인 워싱턴 D.C 를 함락한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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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을 불태워버렸다.



대통령관저인 백악관이 적군에의해 불타버린것또한 현재까지 미국역사상 이 한번이 유일하다.


이때 대통령 영부인은 밀려들어오는 영국군들을 보고 황급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챙겨 도망가야만했던 일화또한 유명하다.




 


이 워싱턴D.C 함락과 백악관 방화사건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미합중국 행정부와 의회,시민들 할것없이 모든 미국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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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이 패전이후 미국의 국방부장관 암스트롱이 바로 해임되었을정도였고,


이제 그들은 다시 식민지로 전락하진않을까 전전긍긍해도 무리가없을정도였다.



그도 그런게, 체서피크만에 기습적인 상륙을 감행한 영국군에 의해 


싱턴D.C , 알렉산드리아등 파죽지세로 미국의 영토는 유린당하고있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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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미국인들의 가장 큰 무기는 학습력과 빠른 적응력이었다.


이리호에서 그러했고 테임즈에서 그러했듯이..


미국인들은 참패를 당할수록 더더욱 독기를 품고 포기하지않고 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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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9월12일, 또다시 전세를 역전시키는 미군의 기적이 볼티모어에서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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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에서 해군과 육군의 합동작전으로 양면으로 몰아붙여오는 영국군의 대공세가 시작된것이다.


총 병력규모는 5천명에 화력지원을 온 전함만 19척에 달했고, 


영국해군의 맥핸리요새를 향한 함포사격은 장장 25시간에 걸쳐 1800여발이 발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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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미군 또한 이 전투에 명운을 걸고 무려 11000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영국군의 공세에 대항했다.


2차 미영전쟁이 개전한 이래 미군과 영국군이 최대규모로 격돌한 회전(會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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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이 흝고간후의 요새의모습은 밖에서보기엔 마치 폐허처럼 보였지만


요새와 미군병사들은 끝까지 버텨내었고,


요새가 포연으로 자욱한 이 순간에도 게양된 성조기는 휘날리고있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감동한 변호사 프랜시스 스콧 키가 


지은 시 ‘별이 박힌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 星條旗)는 훗날 미국의 국가(國歌)가 된다. 



양측의 대병력이 동원되고 해군의 화력지원까지 동원된 격전, 


볼티모어 전투는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 


볼티모어 전투의 패전을 기점으로 마침내 영국 본국에서도 미국과 휴전조약을 위한 논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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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과 몇일뒤...


이번에야말로 미군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안겨주고 유리한 종전협상을 이끄려는 의도하에


영국군은 마지막 총공세를 개시한다. 1914년 9월6일, 플래츠버그 전투의 시작이었다.



영국측은 나폴레옹 전쟁 종전이후 생겨난 여력을 활용할수있었고,


이번엔 볼티모어 전투때 동원한 병력의 2배를 넘어서는 무려 11000명의 훈련받은 영국정규군을 투입해왔다. 


역시나 저번처럼 육전과 해전이 병행되는 대규모 합동전이 예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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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미군측의 상황은 볼티모어때와 달리 굉장히 피폐해져있었다.


계속해서 증원되어오는 영국군에 대응하기위해 지역거점들을 방어하기위해


미군의 전력은 쪼개져 약화된 상황이었고 이때 플래츠버그 방면으로 즉시투입하여 대응할수있는


미군측 병력은 고작 1500명으로, 전적으로 해상전력의 선전에 기대를 걸수밖에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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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맥도너가 이끄는 미해군함대와 조지 다우니가 이끄는영국해군함대간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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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함선:코르벳 1척(열세)

           스쿠너 1척 

           브리그 1척

           슬루프 1척

           포함  10척

미군측피해:브리그 1척 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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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함선:프리깃 1척 (우세)

           브리그 1척

           슬루프 2척

           포함 12척


영국측피해: 전함대 나포됨



영국측에는 상위급함인 프리깃이 있을뿐만아니라 수량에서도 미해군과 거의 대등했고,


더욱 중요한것은 영국해군측의 승선병력은 훈련받은 정규군인 반면,


미해군측은 지휘관인 맥도너 본인이 인정할정도로 훈련과 준비가 안된상태였다.


미군은 이번 전쟁기간 내내 영국측의 뛰어난기량에 쫓아가기에 바쁜 신병군대였다.



조지 다우니가 이끄는 영국해군이 해전에서 승리할경우,


육지에서 조지 프레보스트가 이끄는 11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해상의 화력지원과함께 공세를 가한다면 미국의 운명은 끝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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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전수전 다겪은 미국인들의 반전드라마는 멈추지않았다.


이리호 전투에 이어... 플래츠버그 전투가 치뤄진 상플레인 호수에서도 


예상을 뒤엎고 토머스 맥도너가 이끄는 미해군이 대승을 거둔것이었다.



그것도 미해군은 단 한척의 손실도없이


영국해군의 프리깃1척과 스쿠너1척, 슬루프2척을 나포하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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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호의 영웅이라고 불리던 페리처럼,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토머스 맥도너또한


훗날 '샹플레인의 영웅' 이라 불리우며 칭송받게된다.


제2차 미영전쟁은 미국인들에게있어서 애국심을 상징하는 수많은 전쟁영웅을 배출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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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측은 해군의 지원을 받을수없게되자 플래츠버그에서 더이상의 공세를 진행하는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조지 프레보스트는 후퇴를 결정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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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계기로 영국군 지휘관들은 더이상 미국을 쉽게 굴복시킬수없음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본국에서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미국인들이 강해졌다는걸 뼈저리게 느껴야만했다.


이제 더이상 미국과의 전쟁을 치루는건 무의미해보였고, 


본국또한 이러한 현지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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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12월 24일, 벨기에 겐트에서 양국간 휴전이 결정된다.. 겐트조약(Treaty of Ghent)의 체결이었다.


당사국인 미국과 영국 양측이 상대방을 이기는것이 쉽지않음을 공통적으로 느끼며,


이 이상의 전쟁을 지속하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수없음또한 일치한 결과물이었다.


겐트조약의 내용은 '양측이 모든것을 전쟁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것' 을 골자로 합의되었고,


미-영간의 국경에대한 의견차이가 완전히 조정되어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겐트조약은 언뜻보기에 승자도 패자도없는 무승부인듯 보인다. 


물론 명문상으론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겐트조약을 통해서 실질적인 득실을 따진다면,


이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본쪽은 다름아닌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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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양측이 전쟁에 임하는데 있어서 조건의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미국인들은 나폴레옹까지 굴복시키고온 영국에 대등하게 싸울수있는 적으로 성장한것이었다. 


당초 목표했던 캐나다지역 점령은 실패하였지만, 계획과달리 나폴레옹이 무너지면서


유럽으로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온 영국군의 정규전력의 침공을 당당하게 맞서 격퇴해낸것이 세계에 알려졌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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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대적배경상, 통신기술이 발전하지않아 유럽대륙에서 겐트조약이 조인되었음에도


현지에서 교전중인 영국군과 미국군 양측진영에는 이러한 사실이 전달되지않아 전쟁은 계속되고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1815년 1월8일, 영국군과 미군의 마지막 대규모전투인 뉴올리언스 전투가 벌어진다.



알렉산더 코크레인이 이끄는 영국군본대 11000명은 종전협상을 영국에 유리하게 이끌기위해


버지니아방면을 향해 공세를 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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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미군측은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이 이끄는... 


정말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된 혼성방어군으로 격퇴에 나서는데,



968명의 연방정규군, 58명의 해병, 106명의 해군, 

1060명의 루이지애나 민병대, 1352명의 테네시 민병대, 986명의 켄터키 민병대,

150명의 미시시피 민병대, 52명의 촉토족 인디언을 합한


총 4662명의 혼성부대를 지휘하여 숫자만 2배를 넘어서는 정규병력의 영국원정군에 맞선다.


병력의 숫자에서도, 훈련과 통일성면에서도 모든게 미군에 불리해보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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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병력:혼성부대 4662명 (심각한 열)


미군측피해:333명 사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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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병력:11000명 (압도적 우)


영국측피해: 2459명 사상자



뉴올리언스 전투는 또다시 예상을 뒤집고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다.


영국군이 순수하게 육상에서 작정하고 걸어온 회전(會戰) 에서,


각종 병종이 다섞인 혼성부대에 반도되지않는 병력으로 미군이 영국군을 압도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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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전역에 뉴올리언스 전투의 승전보가 보도되면서 앤드류 잭슨은 전국적인 스타로 등극,


최고의 전쟁영웅으로 명성을 날리며 훗날 그는 미국의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전쟁영웅과 애국심으로 대표되는 미국문화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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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국에서는 기껏 겐트조약 체결해놨더니 원정군이 또다시 


예전식민지에게 참패를 당하며 자존심을 크게 구기는 흑역사로 남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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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를 주름잡는 대영제국을 상대로 


두번이나 대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싸워냈다는 


이 사실자체에 엄청난 자신감과 애국심을 가지게되었고, 


미국인들이 더욱더 상승을 향하기위한 초석이 되었다. 



자신들도 노력만하면 유럽인들에게 지지않는 위대한 존재가 될수있다는 생각이 싹튼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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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국인들의 가슴에는 "우리도 할수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프런티어의 정신의 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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