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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기사의 몰락, 파비아 전투

과정 2017. 10. 31. 07:17


----- Battle of Pavia, 1525-----



인간의 용맹이 전장에서 소용없어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총의 등장 이후일까? 아니면 전차와 폭격기?

 

모두 틀렸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중 하나인 스파르타의 왕 멜레라오스는 이렇게 말했다.

 

"헤라클레스여! 인간의 용맹이 전장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이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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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정세는 긴박하게 흘러갔다.

오스만 제국의 침공위기를 넘긴 이탈리아는 안도할 틈을 가지지도 못한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진영논리에 휘말려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가던 중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스위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마리냐노 전투에서 저지해 이탈리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5세는 스페인,독일,오스트리아에 이어서 북부 이탈리아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고 싶어하였다.

 

두 명의 절대군주 앞에서 이탈리아는 바람앞의 촛불 행세였고 두 거대 제국은 서로의 눈치를 봐가며 호시탐탐 이탈리아 침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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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이 제일 사랑하는 국왕 프랑수아 1세-

 

선수를 친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기세를 꺾기위해 1524년 10월 4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프랑수아의 군대는 7천여기의 중무장기병대, 수천의 스위스 용병대와 1만5천의 보병, 그리고 53문의 대포를 동반한 최대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진격, 1개월도 채 안되어 북 이탈리아의 최대 도시 중 하나인 밀라노를 점령해버렸다.

 

밀라노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밀라노를 거점으로 순식간에 북 이탈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프랑수아의 다음 목표는 합스부르크군이 주둔하고 있던 파비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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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절대강자, 합스부르크 신성로마-

 

당시 파비아에는 9천여명의 합스부르크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밀라노를 포함한 이북의 여러 도시들을 잃은 파비아의 주둔군은 사실상 외부 세력의 지원없이 4배 이상이나 되는 군대를 상대로 도시를 수성해야했고, 프랑스 군은 50문이 넘는 대포까지 동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파비아 수성군은 몇개월이나 성을 지키며 프랑스군의 맹공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24년 12월, 스페인 군대가 파비아 주둔군을 돕기위해 출정했으나 제노바에서 프랑스 해군에 패배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피렌체의 메디치가도 자신들의 검은 군단을 동원해 합스부르크를 공격하며 프랑스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프랑수아1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와도 협약을 맻어 합스부르크의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차단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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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파비아-

 

하지만 여전히 파비아는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군은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않고 적이 스스로 자멸하게 내버려두기로 한 것이다.

도시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해 적들이 아사해버리게 하는게 바로 그들의 전략이었다.

 

상당히 규모있는 도시였던 파비아의 식량은 금세 바닥났다.

하지만 그들은 개와 고양이, 당나귀 등을 잡아먹으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수아 1세도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는 결코 당하고만 있을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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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카를 5세가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대제국은 유럽 최강국의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자국 최고 용병부대인 란츠크네히트를 스위스로 보내어 우선 프랑스내의 스위스 용병들을 병력에서 이탈하게끔 하였다. 5천여명의 스위스 용병대가 자국을 수비하기위해 귀환해야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이탈리아 지휘관 샤를 드 란누아는 란츠크네히트들의 지원에 힘입어 드디어 반격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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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남미에서 활약한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그들은 스위스식 기업 용병이 아닌 개인 용병으로 복장과 무장이 자유로웠고 민주적인 규율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1525년 2월,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군은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이탈리아로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그들은 곧바로 파비아로 진격해 도시 해방에 성공한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는 물러나지 않고 전병력으로 하여금 다시 도시를 점령하려 하였고 결국 근세 유럽 최대의 드림매치인 프랑스vs합스부르크 전면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럼 전면전에 앞서 양측의 병력을 살펴보자.


우선 프랑스군이다.

프랑스군은 란츠크네히트의 스위스 침공으로 상당한 스위스 용병을 본국으로 보내줘야했으며 그간 전쟁으로 상당히 병력이 축소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병 17000명 기병 6500 대포 53문의 대군세였다.


합스부르크도 적지는 않았다.

지원군의 합세로 강화된 19000의 보병과 4000의 기병 그리고 대포가 17문 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장의 꽃 이라고 할 수 있던 기병대가 프랑스와 비교해 확실히 열세였으며 심지어 프랑스의 기병대는 완벽히 중무장한 중기병대였고 공방전의 필수요소인 대포의 수도 프랑스가 훨씬 많았다.

여러보로 합스부르크가 유리하지 않은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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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의 란츠크네히트를 이끌던 역전의 용병대장 프룬츠베르크-


전투는 1525년 2월 23일 저녁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초반부터 스위스 용병과 중기병대를 중심으로한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대포를 이용해 합스부르크의 공격을 초기에 차단하는 한편 중무장한 병력들로 하려금 순식간에 성벽을 뚫고 도시 내부로 진입하려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처음부터 완벽히 실패하고 말았다.

병력 자체는 프랑스가 많긴 했지만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고, 결국 프랑스군은 도시 포위를 위해 길고 얇은 진형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고 도시내부의 합스부르크 군은 넓게 퍼진 프랑스 군대를 각개 격파 해가면서 도시를 비교적 손쉽게 수비할 수 있었다.



-절대무적의 황금비율.스페인의 테르시오는 전장을 지배했었다.-


한편 합스부르크는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프랑스의 주요 병력이 파비아 성을 공략하는데 열중이었던것을 이용, 전 기병대와 일부 스페인 보병대를 우회시켜 프랑스군 진영으로 이동시켜 후방의 포병대와 진지수비군을 공격해 프랑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프랑수아 1세는 당황해 급히 기병대를 후방으로 이동시켰지만 이미 적은 도주한 이후였고 프랑스군은 재정비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합스부르크 역시 재정비를 하며 성안에서 만발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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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전투의 상징이자 꽃, 기사계급은 이후 완벽히 몰락한다-


24일 오전 7시 전투가 재개되었고, 중세 최대의 보병대라 손꼽히는 란츠크네히트와 스위스 용병대의 전투는 실로 치열했다.

메디치가의 검은 군단이 합세한 프랑스 보병대와 합스부르크 보병대는 서로 물러서지 않고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며 양측의 기병대 역시 치열한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화약냄새가 전쟁에 감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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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용맹이 전장을 지배하던 시기는 끝났다."-


1500여명의 화승총을 장비한 스페인 아르케부스가 란츠크네히트에 가세함과 동시에 양상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란츠크네히트의 장창뒤에서 보호를 받으며 적들을 향해 일제히 발포하는 모습은 화승총 부대의 개념이 없던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새로운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용맹한 스위스 용병들이 순식간에 쓰러져 갔으며 이윽고 메디치가의 검은 군단도 스위스 용병의 괘멸과 함께 란네츠크히트에게 몰살당했다.


곧 프랑스 기병대도 화승총부대의 총알 세례를 받고 궤멸하였으며 이틀간에 걸친 파비아 공방전은 합스부르크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다.


프랑스는 12000명이 전사하였으며 합스부르크는 단지 500여명을 잃었을 뿐이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화승총부대에 포위되어 포로 신세까지 되었으니 프랑스의 권위와 영향력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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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신성로마의 황제 카를 5세-


그와 반대로 카를 5세는 전성기를 이룬다.

파비아 전투이후 이탈리아내의 단독 영향권을 구축한 카를은 교황을 압박하게 되었으며 이미 통치하고 있던 남부와 더불어 이탈리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으며 프랑스의 프랑수아는 마드리드에서 굴욕적인 조약을 맻은 이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파비아 전투는 전술의 발전과 체계를 뒤바꾼 희대의 명전투 였다.

중세 유럽을 대표하던 병종들이 직접적으로 맞붙은 대규모 전투였으며 앞으로 벌어질 모든 전투의 양상을 바꿔버린 사건이다.


이 전투로 유럽 봉건 기사 계급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그에 따라 유럽은 봉건제가 아닌 군왕 중심의 절대왕정이 시작되며, 전장은 바야흐로 칼과 창이 아닌 총과 대포가 지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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