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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서애 류성룡

과정 2017. 10. 3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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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西厓) 성룡(柳成龍)  [1542~1607]

 

오늘은 개인적으로 내가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사람인 성룡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해.

 

하여튼 이 류성룡이라는 인물은 살아생전 이뤄놓은 업적에 비해 인지도가 비교적으로 낮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류성룡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임진왜란의 극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것과 대동법의 아버지 격이라 볼 수 있는 수미법을 주장한 것 정도이다.

 

"류성룡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공을 세워봐야 얼마나 세웠겠어? 이순신 미만 잡" 이라고 말할 게이들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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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바로 그 이순신 장군을 조정에 천거하여 벼슬길에 오르게끔 한 것이 류성룡의 큰 업적 중 하나야.

 

또한 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조정에서 이순신이 온갖 모략으로 공격받고 있을 때 유일하게 실드를 쳐준 사람이기도 하지.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선조 84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7일(무오) 3번째기사

 


 

윤두수가 아뢰기를,

 

"(전략) 이순신의 죄상을 이미 헌의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경질)시켜야 할 듯 합니다."

 

 

하고, 정탁이 아뢰기를,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

 

 

하자 상(임금, 선조)이 이르기를

 

"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원균으로 대신해야 하겠다. "

 

 

하였다. 이산해가 아뢰기를,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졸들이 보고 본받기 때문이다. "

 

 

하였다. 류성룡이 아뢰기를,

 

"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

(이하 류성룡에 대한 선조의 질문은 생략.)

 

" 직사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臣)이 조산 만호로 천거했었습니다. "

 

 

이순신이 바다에 나가 직접 싸우는 역을 맡았다면, 류성룡은 중앙에서 도체찰사로써. 영의정으로서 조정과 싸우는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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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로 선조가 의주로 파천했을 무렵에 선조가 갑자기 이산해와 류성룡을 부르며 요동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비친 것이다.

 

 

상이 동파관을 출발하다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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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아침에 상이 대신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괴로운 모습으로 이르기를,

 

" 이모(李某)야 유모(柳某)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

 

 

상이 이항복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

 

 

하니, 대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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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가가 의주에 머물만 합니다.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

 

(중략)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 안됩니다. 대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부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

 

류성룡의 반대에 선조는 본디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요동 내부(內附,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 들어가 붙음)의 의사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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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성룡이 안된다고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 신이 말한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

 

 

하고, 성룡과 반복하여 논쟁하였는데, 성룡이 말하기를,

 

" 지금 관동과 관북 제도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텐데 어떻게 이런 말을 갑자기 할 수 있겠는가. "

 

 

하였다. 성룡이 물러나와 항복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자네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

 

하니, 항복이 사과하였다.

 

 

이후 선조는 요동으로 넘어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하는데, 이유인즉슨 앞서 인용했던 류성룡의 사력을 다한 반대와 설득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 조정을 요동의 빈 관아에 대충 놓겠다고 표명하자 의주에서 장기전을 대비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명나라의 소식을 듣고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세우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6일(갑인) 7번째기사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내부를 청한 자문을 보고 장차 우리나라를 관전보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책임이 류성룡에게 있다고 생각한 선조는 임진왜란 종전 이후, 이 뒤끝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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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류성룡은 이순신 뿐만이 아니라 훗날 조선군의 반격을 알린 행주대첩을 이끈 명장이자 도원수 권율을 천거하였다.

 

권율은 행주대첩 이전부터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하여 이후에는 육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도원수, 종전 후에는 일등공신에 봉해진다.

 

그러니 별 다른 언급 없이 넘어가도록 하자.

 

 

류성룡은 인재를 추천하는 것 외에도 본인 스스로 중앙 실무에 뛰어났고, 전쟁 내내 발 바쁘게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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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그 외에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후기 군사 제도의 근간이 되는 5군영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바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조총을 다루는 포수(砲手), 활을 다루는 사수(射手), 그리고 살수(殺手)의 삼수병 제도를 확립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20일만에 한양이 밀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인 제승방략 체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할 것을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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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방략이란, 하나의 집결지를 설정해서 그 주변 지역에서 병력을 모아다가 한 곳에 모이면 그곳에 조정에서 보낸 장수가 지휘하는 것이다.

 

이 제도의 문제점은 임진왜란 당시 낱낱이 찾아볼 수 있는데. 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데 중앙에서 아직 장수가 오지 않아 전투도 없이 해산되거나,

 

장수가 중앙에서 임지로 왔는데 모일 병사들이 없거나, 그런 경우가 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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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 중 하나로 순변사 이일이 상주로 나아가 적과 싸움을 벌이고자 하였는데 기껏 도착해보니 농민병 수백 밖에 없었던 일화를 들 수 있다.

 

물론 제승방략이라는 제도 자체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이 200년간의 평화에 젖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한 제도적, 군사적 문란으로 인해 이러한 폐단이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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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점에서 류성룡이 주장한 것이 진관제도이다. 이 제도는 각 마을 하나를 진관(鎭管)으로 삼아, 그 수령이 장수가 되어 싸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서울에 왜군이 침입했다고 칠 때, 서울시장인 박원순이 장수가 되어 적과 맞서 싸운다고 보면 되겠다.

 

이 제도는 제승방략 체제보다 방어에 용이하고 대응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군사 수가 그만큼 많아야하고 제도가 뒷받침해줘야 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조선이 어느 정도 평타를 치는 상태에서 이런 제도적 논의가 이뤄졌으면 모를까, 근본이 썩어문드러져서 무얼 했든 졌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건의 자체는 좋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를 받쳐주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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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류성룡은 이이와 같이 수미법(收米法)의 시행을 건의했는데, 수미법이란 앞서 말했듯이 대동법의 아버지 격이라고 보면 된다.

 

조선 전기부터 방납, 대납업자의 폐단이 극심하게 창궐하여 농민들이 공납을 마련해서 낼 수 있음에도 이를 막고 자신들이 대신 내준 다음,

 

이에 대한 이자를 10배, 많게는 수십배까지 붙여서 농민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하고 농민들이 논밭을 떠나게 하니 어찌나 큰 일이겠는가.

 

 

아니면 농민이 낼 수 없는 것을 대신 내주고, 사실 이게 방납업자가 하는 일이긴 한데 문제는 농민이 갚는 것을 일부러 받지 않고,

 

기간을 넘겨서 왜 안갚았냐고 통수를 치고 크게 이자를 붙여 받아먹으려고 하니. 위와 같은 폐단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납이 무엇이냐에 대해 부연설명하자면, 조선시대 백성들은 세금과 역이라고 해서 군대에 갈 의무와 노동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공납이라고 하여 각 지역의 특산물을 바치는 게 있는데, 세금과 달리 언제, 얼마나 낼지 정해져 있는것도 아니고 들쭉날쭉 한데다.

 

별공이라고 해서 왕실이나 관청에서 필요하면 별도로 그냥 어거지로 내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게다가 농민인데 전복이나 귤을 내라고 하는 등 경우를 가리지 않고 조정의 필요에 따라 마구잡이식으로 분배하는 경우도 흔했다.

 

류성룡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모든 공물을 쌀로 통합하자는 수미법(收米法) 을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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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임진왜란의 극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중앙 실무에도 능했던 류성룡은, 임진왜란 종전 직후 1598년 온갖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사간원이 류성룡을 탄핵하다

선조 106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16일(정유) 1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뢰기를,

 

" 풍원 부원군 류성룡은 간사한 자질에다 간교한 지혜로 명성과 벼슬을 도둑질 하여...

 

정권을 잡은 이래로 붕당을 결성하여 국사를 그르치고 사사로이 행하여 백성을 괴롭힌 죄는 한두가지가 아닙니다.(이하 중략) "

 

 

 

사헌부가 류성룡의 삭탈 관작을 요청하다

선조 106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16일(정유) 3번째기사
           

" 풍원 부원군 류성룡은 본래 재치있고 언변이 뛰어난 자질로서 문필의 하찮은 기예로 수식하여 오랫동안 국정을 전담하고

 

조정의 권력을 마음대로 농락하여 국가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한 죄는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중략) "

 

 

 

이외에도 류성룡을 삭탈해달라는 건의가 1598년 11월 16일 이래로 약 30여건이 넘게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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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들의 간절한 바램대로 류성룡은 삭탈관직되어 낙향하게 되고, 본래 가지고 있던 병세가 악화되게 된다.

 

이후 선조의 몇년에 걸친 부름에도 류성룡은 한번도 응해주지 않았다. 전쟁을 총괄하는 사령관,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맡았던 그였다.

 

크고 작은 공을 두루 세웠고, 율곡 이이에게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종전 직후 토사구팽 당하고 2등 공신에 봉해진다.

 

류성룡은 고향에서 본인의 저서 징비록(懲毖錄) 의 저술을 끝마치고 1607년 향년 66세로 고향에서 숨을 거뒀다.

 

 

 

 

3일간 조시를 정지하다

선조 211권,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5월 13일(을해) 7번째기사

 

사신은 논한다. 도성 각전의 백성들이 빠짐없이 묵사동에 모여 그 숫자가 1천여명에 이르렀다. 묵사동에는 류성룡의 고가의 유기가 남아있었다.

 

각 아문의 늙은 아전 30여명도 와서 곡하였다. 시민과 서리 등이 본가(류성룡의 집안)가 청빈하여 치상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포를 모아 부의하였다. 성 안 백성들이 곡한 일은 오직 이이와 유몽학이 죽었을 때에만 있었는데,

 

이이의 상은 서울에서 있었고. 유몽학은 장령으로 있었을 때 시방의 적폐를 개혁하기를 아뢰어 백성들에게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사람이 조정에서 발자취가 끊어졌고 상이 천리 밖에 있었는데도 온 성안 사람들이 빈 집에서 회곡하였으니,

 

어찌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데도 이어 수상이 된 자들이 모두 전 사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추감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들 역시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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